강민호

과거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한다.

프로 초창기[편집 | 원본 편집]

포항제철고등학교 출신으로 2004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롯데가 그를 지명했다. 롯데의 2005년 시즌은 백인천이 싸질러놓은 똥들을 양상문의 리빌딩 계획으로 치우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굴된 선수 중 하나가 강민호이다. 당시 주전 포수는 최기문이었는데,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태에 연루되어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해 강민호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시즌 강민호는 104게임에 출장해 타율 .243을 기록했다.

2006년 롯데의 감독이 강병철로 바뀌었고, 최기문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자 강민호 혼자 주전을 꿰차게 되었다. 126경기에 전부 출장해 팬들에게 "저거 근성있는 놈이네" 정도로 이미지가 좋아졌고, 타격도 2005년이 역대급 투고타저였음과 포수 전경기 출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타율 .251은 준수한 성적이었다. 홈런도 9개나 쳤고.

2007년에도 주전 자리를 꿰차 125게임 타율 .271 14홈런을 기록했다. 이 시즌 롯데의 타선이 막장이었던 지라 팀 내 두 자릿수 홈런 타자가 이대호와 강민호밖에 없었다. 2시즌 연속 전경기 출장을 기록할 수도 있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

제리 로이스터 부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강민호가 데뷔한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일명 8888577이라 불리는 롯데의 암흑기였다.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 컬러도 "No Fear"를 위시한 강력한 공격야구로 탈바꿈했고, 강민호도 공격야구의 일원으로 맹활약했다. 시즌 122게임 435타수 127안타 19홈런 타율 .292로 활약했고, 시즌 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베이징 올림픽[편집 | 원본 편집]

  • 원래 진갑용의 백업 역할을 기대했으나 진갑용이 부상을 입어 강민호가 더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그런데 결승 쿠바전에서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주지 않자 "Low Ball?(볼이 낮아요?)"라고 질문을 했을 뿐인데 퇴장을 당했다.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글러브를 던져버리는 포스를 내뿜었고, 정대현의 병살타 유도로 금메달이 확정되었을 때 라커룸에 있다가 뛰쳐나와 울면서 진갑용을 껴앉았다. 글러브 던지기의 포스와 마지막 눈물 덕분에 팬이 많이 늘어났다.

이 글러브 던지기 때문에 미국 사이트에서 잠깐 화제가 되었고, 벌금으로 $1250을 내야했다. KBO가 대신 내줬다고.

WBC[편집 | 원본 편집]

  • 박경완에게 밀려 단 2경기에 출장했는데, 하필 출장한 경기가 결승전. 임창용과 호흡을 맞췄는데 임창용이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가 기어이 스즈키 이치로에게 2타점 역전 적시타를 맞는 바람에 임창용과 함께 신나게 까였다. 결국 이 때문에 준우승에 그쳤고, 경기 종료 후 이치로를 거르지 않은 감독 김인식의 잘못이다, 투수코치 양상문의 잘못이다, 포수 강민호가 싸인을 잘못 읽었다며 의견이 분분했으나 2012년이 되어서야 강민호 본인이 싸인을 잘못 읽었다고 인정했다.

2009년[편집 | 원본 편집]

  • 타격도 전년에 대비하면 영 부진하고 볼배합도 발전이 없으며 블로킹도 안 된다는 이유로 비난을 많이 들었다. 시즌 후반엔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고 경기에 나오지 못했으며, 그 사이 2008년 입단한 장성우가 맹활약하며 본인에겐 매우 씁쓸한 해가 되었다.

2010년[편집 | 원본 편집]

  • 117경기 타율 .305. 2014년까지 성적 중 가장 높은 타율이다. 볼배합도 지나치게 몸쪽을 요구한다는 비판을 좀 들었지만 그래도 천하의 김성근 감독이 많이 나아졌다고 칭찬할 만큼 나아졌다. 다만 블로킹이나 도루 저지에선 2009년과 영 다르지 않은 모습. 송구의 정확도가 너무 떨어졌다.

2010년 롯데의 불펜진이 전부 방화범이 된 지라 어떻게 유도를 해도 얻어맞았고, 불쌍한 강민호는 투수들과 묶어서 또 까였다. 8월 초엔 팔꿈치 통증으로 잠깐 쉬었고, 복귀 후엔 한 경기 도루 6개를 허용하는 등 부진하며 다시 까였다. 어쨌든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니 다행.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2루 도루를 저지하려고 송구를 했는데, 2루엔 야수가 없었다. 즉 빈 루에 송구를 해버린 것. 당연히 공은 데굴데굴 중견수 앞까지 굴러갔고, 하필 3루에 주자가 있어서 여유롭게 홈인했다. 이 때문에 팬들은 물론이고 해설위원에게까지 까였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편집 | 원본 편집]

  • 별 활약은 없었고 파키스탄의 147km/h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에게 사구를 맞았다.

여담으로 2010년 시즌 초 김석류 아나운서가 강민호를 이상형으로 꼽았다. 강민호도 요새 누나가 달라졌다는 식으로 맞받아치며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는 썰이 돌았는데, 같은 해 8월 김석류가 김태균과 결혼을 발표하며 졸지에 어장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생긴 별명이 "강민어".

2010년까지의 통산 홈런이 76개인데, 인터뷰를 하던 중 지금이 76개니까 앞으로 26개를 더 치면 100개가 된다는 희한한 덧셈으로 수학자 소리를 잠깐 들었다.

2011~2013 시즌[편집 | 원본 편집]

2011년[편집 | 원본 편집]

  • 시즌 초엔 양승호 감독의 기상천외한 작전 때문에 팀 전체가 슬럼프에 빠졌고, 강민호 혼자 타선을 이끄는 형국이 되었다. 다만 양승호 디버프에선 벗어날 수 없었는지 가끔가다 희한한 실책을 하는 바람에 포수 실책 1위.

5월 22일 김수완과 호흡을 맞췄고, 이대형 타석에서 몸쪽 깊은 공을 유도한다는 게 이대형의 발목을 맞춰버리는 사구가 났고, 절뚝거리는 1루 주자를 향해 견제구를 날려 김수완과 함께 빈볼 논란의 중심에 서버렸다. 그런데 하루 뒤 임태훈-송지선 사건이 터져버리며 그냥저냥 잊혀졌다. 그리고 그 송지선 사건 때 자신 트위터에 애도를 표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시즌 최종 성적은 124경기 타율 .289 19홈런. 2010년을 뛰어넘을 페이스였으나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게 아쉬울 뿐.

SK와의 플레이오프에선 김광현을 상대로 1사 만루에서 깔끔한 5-4-3 병살타를 만들어내는 등 영 힘을 쓰지 못했다.

2012년[편집 | 원본 편집]

  • 무난하게 활약하고 있었고, 롯데가 용덕한을 얻어와서 체력 안배를 좀 할 수 있었다. 6월 22일 LG의 마무리 투수 봉중근에게 역전 투런을 쳤는데, 봉중근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덕아웃에서 소화전을 주먹으로 쳐 시즌 아웃되는(...) 참사가 벌어져 LG는 그대로 DTD를 재현했다.

9월 19일 SK와의 경기에서 김강민과 홈에서 강하게 충돌하며 타박상 및 가벼운 뇌진탕 증세가 생겼고, 그대로 시즌 아웃되었다. 타격에서 한참 활약하고 있었기에 김강민은 롯데 팬들에게 신나게 까였고, 롯데 타선은 이후 물빠따로 전락했다.

포스트 시즌[편집 | 원본 편집]

어찌어찌 본인의 의지로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합류했다. 그런데 1차전에서 전준우의 홈 송구가 왼쪽 눈을 강타하며 또 부상을 입었고, 남은 경기는 용덕한이 마스크를 써야 했다. 다행히 빠르게 회복해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합류했으나 이번엔 타격에서 크게 부진하며 롯데 팬들에게 까였다. 플레이오프 성적이 14타수 1안타. 여기에 5차전에선 2010년 준플레이오프를 재현하는 중견수 송구를 선보이며 임시 금지어 수준으로 까였다.

WBC[편집 | 원본 편집]

  • 전 경기 무안타라는 업적을 세우며 대표팀 광탈에 큰 공헌을 했다. 일명 타이중 참사라는 이 사건의 원흉 중 하나로 까였지만 류중일의 선수 운용에 관한 논란과 포수 수비에서 고군분투한 것, 나지완이라는 병역비리자(...) 때문에 까임은 그나마 적은 편이었다.

2013년[편집 | 원본 편집]

  • 어째 수비형 포수로 각성했다. 타격은 타율 .235 11홈런으로 망한 대신 도루 저지율 리그 1위, 포수 실책 최소 1위로 수비형 포수가 되었다.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 포수들은 이거보다 못한지라(...) 자연스럽게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통산 4번째 골든글러브.

FA[편집 | 원본 편집]

강민호는 2013 시즌 후 FA로 자유의 몸이 된다. 시즌 말부터 저 정도 젊은 포수면 도대체 얼마를 줘야하나 얘기가 돌고 있었고, 롯데 팬들도 깔때는 신나게 깠지만 정작 FA로 떠나면 다시 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롯데 프런트가 "다른 팀은 강민호 구경도 못할 것"이라는 패기넘치는 발언으로 주목받았고, 결국 11월 13일 계약금 35억 연봉 10억 4년 무옵션 총액 75억으로 초대형 계약을 성사시켰다.

협상이 상당히 훈훈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구단에서 강민호는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고 공언했고, 강민호도 "그러면 구단이 알아서 해 달라"며 깔끔하게 계약이 끝났다고 한다.

발표 직후 팬들은 거품 아니냐며 불이 붙었다. 기존 심정수의 60억을 뛰어넘는 초대형 계약이었고, 2013년 영 부진했기 때문에 저 정도 가치가 있냐 논란이 일었던 것. 그런데 후에 강민호가 인터뷰 때마다 롯데 팬들을 언급하고, 페이스북에 팬들을 위해 글을 쓰며, 롯데에 남기 위해 지인과 싸웠다는 기사까지 뜨며 팬들에게 추양받았다. 무엇보다 이대형의 4년 24억 계약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여론이 급격하게 강민호는 착하게 계약한거다라며 돌아섰다.

FA 이후[편집 | 원본 편집]

2014년[편집 | 원본 편집]

  • 말아먹었다. 2013년부터 이어진 타격 부진과 FA 계약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감, 워낙에 낮은 BABIP 등이 모두 중첩되어 타격에선 흐름을 뚝뚝 끊어먹는 원흉이 되었고, 급기야 "강극혐"이라는 별명이 붙기에 이르렀다.

수비는 2013년과 별 다를 게 없다. 어째 값비싼 수비형 포수가 되어버렸는데 용덕한은 수비형 포수가 수비를 못하고, 장성우는 비시즌에 사생활 문제가 생겨 1군에 오지 못하며 수비를 보고서 강민호를 쓰는 희한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8월 말부터는 타격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는지 좀 나아졌는데, 8월 30일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LG쪽 관중석에 물병을 던지는 대형사고를 쳤다. 본인은 관중에게 던지려던 게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러면 또 심판에게 던졌냐는 논란만 생길 뿐이었다. 결국 9월 1일 200만원의 벌금과 40시간 봉사라는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결국 빼도박도 못할 먹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나마 8~9월 부활의 모습을 보인게 희망적이라면 희망적일 듯.

2015년[편집 | 원본 편집]

  • 사람이 달라졌다. 4월 5일 하루에 3홈런 8타점을 몰아치더니 계속해서 타점을 생산해냈다. 5월 16일 벌써 시즌 3번째 만루홈런을 기록했고, 5월 24일엔 부러진 배트로 담장을 넘기는 괴력을 과시했다.

6월 들어 팀이 침체되기 시작할 때 강민호는 홈런왕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고, 6월 24일 시즌 24홈런을 치며 한 시즌 개인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6월 27일 급작스런 햄스트링 부상으로 휴식을 갖게 되었고, 휴식 이후론 그냥저냥 평범해졌다.

올스타전에 참가해 3타수 2안타 1홈런으로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포수가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건 강민호가 최초. 부상으로 기아 K5를 받았는데 이건 어머니께 드린다고 밝혔다.

  • 7월 21일 1군 복귀.
  • 8월 5일 시즌 최다 만루 홈런 타이.
  • 9월 11일 박경완 이후 11년만의 포수 30홈런, 이대호 이후 5년만에 팀 내 30홈런.

2016년[편집 | 원본 편집]

  • 감독 지명으로 주장.
  • 4월 9일 이승엽, 이호준과 함께 통산 만루 홈런 4위.
  • 6월 18일 63호 삼중살.
  • 7월 22일 김문호와 더블 스틸.
  • 10월 2일 2년 연속이자 3번째 시즌 20홈런.

2017년[편집 | 원본 편집]

  • 롯데에서의 마지막 시즌
  • 통산 200홈런 기록
  • 플레이오프에서 심하게 부진.

2018년[편집 | 원본 편집]

  • 4년 80억원에 삼성으로 이적.
  • 2.21 실전 연습경기에서 첫 타석부터 홈런.
  • 타점은 더 늘었지만, 전체적으로 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