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군

Naval Ensign of Japan.svg
일본 해군의 군기(軍幟) 극혐
정보
활동시기 1868~1945
국가 일본 제국
소속기관 대본영
일본 해군성
군령부
산하기관 진수부
연합함대
일본 해군 육전대
일본 해군 항공대
참가한 전쟁 타이완 출병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지휘관
대원수 메이지 일왕
다이쇼 일왕
히로히토 일왕
원수 (저명한 사령관) 이토 스게유키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구치 다몬
야마모토 이소로쿠
출처:wikipedia:en:Imperial Japanese Navy

일본 해군은 1868년부터 1945년부터 존재했던 일본 제국의 해군이다. 설립 당시 여러 번의 해군을 하나로 통합해 설립했다.

기원[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설립[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일본 제국 설립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청일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영일동맹러일전쟁[편집 | 원본 편집]

영일동맹 기간에는 영국의 여러 해군 기술, 전술을 들여왔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7개월간 항해를 한 뒤 쓰시마 해협에 도착한 발틱 함대를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둔다.

제1차 세계 대전[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전간기[편집 | 원본 편집]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를 지칭하는 시기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래로 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이전까지는 이 시기를 해군의 휴일이라고도 칭한다. 물론 실제로는 신기술을 적용해서 새로운 군함들을 조약에 위반되지 않는 선, 아니면 조약상 허점과 조약을 어기는 식으로 발전하였다. 일본 제국도 절대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이후[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결과적으로 패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열강들은 제2의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각종 조약을 맺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해군도 당연히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일본은 전쟁 이후 여러 열강들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춰야 한다는 분위기가 나면서 영일동맹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된다. 당시 일본은 독자적인 세력을 영위하기 위해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으로 이루어진 주력함대 계획인 88함대 계획을 수립한다.

당시 일본은 여러 전함들과 러일전쟁에서 노획한 전함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구식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기 때문에 88함대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시상황도 아닌데 일본의 전체 예산중 30%가 해군이 차지하게 되면서 일본 내부에 자연스럽게 반발이 일어났다.

1921~1922년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성공적으로 체결되어 주력함(전함) 건조가 중지되었다. 함대 증강 계획인 88함대 계획이 순식간에 백지화되면서 일본 해군의 비정상적인 팽창이 중단되었다.

일본 해군은 조약이 체결되는 동시에 조약을 지키자는 조약파와 조약을 무시하고 세력을 키워나가자는 함대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조약파는 소수에 해당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함대파가 주를 이루었다. 일본 해군은 조약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대신 보조함 (중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잠수함)을 중점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전함 건조가 중단되어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은 전함 무츠 (전함)를 건조했다. 하지만 이는 영국과 미국에게 나가토급과 동급인 16인치 전함 2척(넬슨급 전함, 콜로라도급 전함[1])을 보유하게 되는 일을 만들었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 이후부터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소수의 전력으로 미군을 맞상대하기 위해 각종 전략전술을 연구했다. 이 전략전술은 쓰시마 해전을 바탕으로 함대결전점감요격이라는 전략전술을 만들어냈다.

우선 구축함과 순양함, 잠수함으로 미 해군의 전력을 감소시킨 뒤 (점감요격) 전함 등의 주력함대로 미 해군의 주력함대와 결전 (함대결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일리는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건 문제점이 있는 이론이었다. 소규모로 이루어진 보조함 전력을 이용하여 대규모 함대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거의 자살돌격에 가까웠다.

당시 함대구성을 보면 전함 3~4척과 함께 순양함 수십척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전함은 순양함과 구축함보다 한등급 더 높고, 배수량, 장갑, 화력면에서 우월한 편이라서 손톱만한(...) 포를 가진 순양함과 구축함은 거의 포격전으로는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하지만 전함은 순양함이나 구축함에 비해 화력지속성이 떨어졌다. 지근거리 내에서는 주포탄으로 반격이 불가능한 약점을 가지고 있어 지근거리까지 다가간 뒤 어뢰를 살포하면 되었다.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측면의 부포와 전함의 생존성이었다. 당시 전함의 측면에는 선체의 옆면에다 6인치 부포를 장착하여 근거리 교전에 대비되어 있었고, 전함에는 응급복구와 화재진압 인력이 풍부하고 데미지 컨트롤 능력도 뛰어나 구축함과 순양함이 큰 화력을 쏟아부어도 전함은 격침시킬 수 없었다.

또한 가상적국인 미국은 전함 운용 능력 면에서 일본보다 한단계 앞서 있었으니... 한마디로 말하자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테프전에서 테란이 바이오닉과 스파이더 마인만으로 프로토스의 전력을 대폭 깎아먹은 뒤, 메카닉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은 이 함대결전사상의 문제점을 자각하지 않고 오히려 집착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위반되지 않는 선에서 구축함과 순양함 전력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이런 함대결전에 대한 과도집착은 보조함 뿐만 아니라 전함에도 나타났다.

전쟁이 끝나기 이전에 일본군은 16인치 전함인 나가토급 전함 2척(나가토, 무츠) 을 건조하고 있었고, 나가토는 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취역이 완료되었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조약 탈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은 막상 조약을 탈퇴한 이후에도 조약을 준수하는 척 연막작전을 시행했다. 그러고는 해군력을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야마토급 전함 건조도 조약 탈퇴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 원본 편집]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에서 선전포고 없이 미국을 공격했다. 미 해군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으나,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 선빵의 대가는 매우 참혹했다.
  •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는 대대적인 패배를 당해 전쟁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겼다. 여기에는 뜻하지 않게 같은 해군의 구축함 아라시이 한몫을 했다.
  • 1942~1943년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국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으나, 결과적으로 미국이 승리하여 미국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었다.
  • 1944년 6월에는 필리핀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군의 항공세력을 완전히 전멸시켜 등골을 휘게 만들었다. 이때 미 해군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해서 다들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 1944년 10월에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 해군이 압승을 거두어 일본 해군을 완전히 제기불능으로 만들었다.
  • 1945년 7월 28일에는 구레 군항 공습에서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에 의해 상당수의 군함을 잃어버렸다.
  • 1945년 8월 6일과 9일에는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6일 뒤 1945년 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을 한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일본 해상자위대로의 계승[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문제점[편집 | 원본 편집]

막장 국가의 해군답게 상당수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 역사적으로 해군과 육군의 체계가 너무 다르고 뿌리도 다르고 출신을 따지는 문화 때문에 대립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제국 시절 해군과 육군끼리 서로 총질을 하고 뭐좀 하려고 하면 해군이 발목잡기도 했다.(…) 히로히토 왕세자의 비(妃)를 간택할 때도 육군과 해군이 대립했는데, 육군은 이치조 도키코(一條朝子)를, 해군은 구니노미야 나가코를 왕세자비로 만들려고 애썼다.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나가코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었으나, 그동안 어마어마한 다툼이 있었다. 심지어 현대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까지 이런 문제점이 내려온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콜로라도급 전함은 조약 체결 이전에 1척이 건조가 완료되어 취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