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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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範圖(또는 洪範道). 호는 여천(汝千), 러시아식 이름은 Хон Бом До.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68년 8월 27일 평양 외성 서문안에 있는 무열사 앞마을에서 출생했다. 독립운동 이전의 생애는 <홍범도 일지>와 세간의 소문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아버지는 홍윤식(洪允植)으로 가난한 농부였고[1], 어머니의 성씨는 알려진 바 없다. 태어난지 일주일 만에 모친이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부친이 젖동냥을 하여 간신히 살려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친 마저 7세 때 사망하는 바람에, 그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이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했다. 그러다 15살 때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해 3년간 근무하며 총기 사용법과 제식 훈련을 익혔다. 그러나 군교들이 부정부패를 심하게 하고 사병들을 학대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군교를 구타한 뒤 병영을 탈출했다.

탈영 후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지만, 공장 주인이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품삯마저 7달이나 주지 않자 격분한 나머지 주인을 구타하고 제지 공장을 떠났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입산하여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지담대사의 법문과 설법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지담대사는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하며, 홍범도는 그로부터 이순신 등 영웅들의 임진왜란 시기 활약상을 전해들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다 신계사 인근의 절에서 비구니로 지내던 이옥구와 사랑에 빠져, 평생 함께 할 것을 약속한 뒤 파계하여 금강산을 떠났다.

그는 아내의 친정이 있는 함경북도 북청군으로 가려 했지만, 도중에 건달패를 만나는 바람에 아내와 이별하였고,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고,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 솜씨를 발휘하여 수렵 활동으로 먹고 살았다.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홍범도가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金壽莢)과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철령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김수협은 경북 의성에서 김상종(金象鍾) 의병장 휘하에서 관향장(管餉將)으로 활동하다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 인물로, 홍범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홍범도가 을미의병에 가담했음을 입증할 만한 기록 역시 부족하다. 다만 1896년 7월 제천의진을 이끌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을 피해 북상하던 유인석(柳麟錫)과 합세했을 가능성은 있다.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유인석은 자신의 자인 여성(汝聖)의 '여(汝)'를 따서 홍범도에게 '여천(汝千)'이라는 호를 지어줬다고 한다.

1897년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올라와서 아내와 재회하였고,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다. 이때 탁월한 사격 솜씨를 발휘해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존경을 받았고,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이 되었다. 그렇게 평범한 산포수로 살아가던 그는 1907년 말부터 의병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의병 활동[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9월 3일,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했다. 이것은 한국인의 의병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느낀 산포수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일본 경찰 역시 화승총을 회수할 경우 산포수들이 반발할 것을 예상했지만, 일본 정부는 각 면의 면장들에게 총포를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산포수들은 이에 맞서기 위해 봉기하기로 결의하고, 총기 회수를 주도하던 면장 주도익을 비롯한 일진회원을 살해했다. 현지 경찰은 주도익 척살에 대해서 일제의 한국 침략 정책과는 무관한 한인간의 불화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으로 축소보고했고, 함경도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현재 지역민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일부 일진회원의 비리 문제라면서, 일본군의 주둔은 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함경도민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이 정도 회유에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반일 감정이 매우 팽배했고, 러일전쟁 발발 후 함경도에 군정을 강제로 설치한 일본군이 군사적 필요에 따라 도로 및 교량 등이 건설하면서 주민들을 강제 동원했다. 군정에 반발한 일부 군수는 강제로 해임되었다. 또한 한국 최대의 삼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백두산 인근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 특히 삼수지역의 삼림을 수탈하기 위하여 영림창을 설치했다. 함경도민들은 이러한 일제의 수탈에 반감을 품던 중, 총기를 회수해 생계마저 끊으려들자 그동안 참고 있던 울분을 일시에 터트렸다. 일본군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함경도민의 봉기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폭도 봉기의 원인은 하나로써 족하다 할 수 있으나 이는 요컨대 다음 3가지 점에 귀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① 정변의 결과 혁신에 불평을 가진 자. ② 민간의 총기를 압수함에 기인하는 자. ③ 단발 시행과 일진회원(一進會員)의 횡포를 분개함에 기인하는 자. 이상 3가지 원인은 각기 독립되어 폭도 봉기의 원인이 되며, 또는 병합하여 이것이 도화선이 되며, 덧붙여서 한병의 해대(解隊), 경성의 폭발은 대개 각지의 민심을 동요하게 된 동기가 되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일한협약(日韓協約) 체결은 다시 일종의 국민적 악감을 촉진시켜 민심의 격동은 곧 각도에 유발하여 배일사상은 점차 관내에 만연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는 '우리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평가되는 자유시사변 당시 홍범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일부 논란이 되기도 한다. 휘하 부대등 홍범도 관련 독립군부대가 이사변의 피해자라 할만했다. 왜냐하면 허재욱의군부 독립군은 이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홍범도 부대와 함께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홍범도는 자유시사변이 일단락된 뒤인 1921년 9월 연해주 지방에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명의로 "우리 고려 노동군중에게"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때에 단속법이 발포되어 이의 시행이 촉구되자 관내의 각 군아 및 경찰서에서는 이의 압수에 전념한 결과 엽사(獵師)[사냥꾼]와 같이 총으로써 유일한 재산으로 삼아 이에 의해서생계를 이어가는 자는 장차 자기의 업무를 빼앗기고 호구의 길을 잃게 되는 경우에 빠짐으로서 관현의 조치에 대하여 심한 원성을 내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군수(郡守)의 대부분은 일진회원(一進會員) 출신인 까닭에 면장 등과 일진회에 속하는 자들 대부분은 민간에 대해 단발을 강요하며 서로 세위(勢威)를 농간하여 민심의 격동을 야기 시켜 신정(新政)을 좋지 않게 여기는 완고한 양반 · 유자(儒者)는 이에 반항하여 우민(愚民)을 교사 선동시키고, 또는 엽사(獵師) 등과 상호 응하여 드디어 폭도를 산출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는 이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 안산사에서 포수들을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 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은 부대를 효율적으로 운용을 위하여 10명을 1개 대(隊)로 총 7개의 대를 편성했다. 지휘부는 안산사포계주였던 임창선이 도독으로 추대되었고 홍범도와 차도선(車道善)은 부도독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의병부대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조직을 한국군 편제를 참고하여 재편했다. 기본 25명을 1개 분대로 2개 분대를 1개 소대로, 2~3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편성했다. 전투 편성 이외에 군중기찰의 업무 및 일진회원 죄상을 조사하는 도검사, 의병들의 식량보급을 전담하는 군량도감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수비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정보원을 추가로 편성했다. 또한 중대장과 같은 주요 직위자들에게는 정식으로 사령장을 발급했다. 이러한 편성과 임무 부여는 부대원 증가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무질서를 통제하고 전투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 의병대는 안산사에서 압수한 총포를 북청으로 수송 중이던 일본군경 4명을 습격했다. 그 결과 해산진 목재청 소속 일본인 1명과 우편마차 호위 일본군 2명을 살해하거나 부상입혔으며, 무기와 물자를 노획했다. 이에 일본군은 11월 24일 2개 부대를 편성했다. 첫 번째 부대는 미야베(宮部) 보병대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0여 명으로 편성하여 북청 쪽에서 후치령 방면으로 공격했다. 두 번째 부대는 아오토(靑砥) 보병대위 지휘하에 노가미(野上) 경부의 경찰 병력을 포함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신풍리 쪽에서 후치령 방면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홍범도 의병대는 후치령의 험준한 지형과 내선의 장점을 이용하여 진지를 편성해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최소 사망 3명, 부상 4명이 발생했고, 의병대는 전열을 유지한 채 북청읍 남쪽의 장항리로 기동했다.

의병대는 험준한 산맥을 지나 일본군의 주요 군사거점인 북청 남쪽의 장항리에서 다시 일본군 수송 부대를 급습하여 대량의 전투 물자를 획득했다. 이에 아오토 대위의 일본 부대가 추격했지만, 의병대는 이를 파악해 적이 도착하기 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북청읍 관내의 삼수성을 12월 29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일본군은 12월 30일 바로 삼수성을 공격했지만, 의병대의 항전을 뚫지 못했다. 일본군은 미키(三木) 소좌 지휘하에 북청 수비대의 장교 이하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총 175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재차 공격을 가했지만, 의병대는 적이 미리 갑산읍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수비 분견초와 일제 경찰의 순사 주재소 등을 공격하고, 갑산 우편 전신 취급소를 파괴했다.

홍범도 의병대는 기동과 기만을 결합하여 다양한 전술을 통해 능동적으로 일제를 공격하였다. 갑산 도하리에서는 귀순을 가장하여 김원흥 등 순사 6명을 유인하여 전멸시켰고, 삼수군 고거리 옥응호에 대한 습격 때는 일본군에게 귀순한다는 의사를 허위로 보내 일본 순경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을 때 일본 경찰분소를 공격했다.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회피했지만, 1908년 4월 27일 평안북도 강계의 평남진 부근의 전투와 5월 2일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서의 전투에서는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매복 공격했다. 또한 기동성이 우수한 일본군과 불의에 조우한 경우에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기동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의병대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홍범도 의병대가 이처럼 맹활약할 수 있었던 건 여러 요인이 있었다. 함경도민들은 전투원으로 참여하거나 물자를 제공하고, 일본군경에 관련된 정보를 소상히 전달했다. 그 결과 의병대는 가장 많은 때는 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하였고, 일본군의 토벌을 손쉽게 회피하면서 헛점을 제대로 노릴 수 있었다. 또한 의병대가 사용하는 화승총은 신식 총기에 비해서 성능이 뒤떨어졌지만, 구조 자체가 워낙 단순해서 민간의 평범한 대장간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어 대량 양산이 가능했으며, 흑색탄약과 탄환 역시 만들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신식 총기가 가장 많이 보급된 함경도에서도 의병이 가지고 있는 무기 대부분은 화승총이었다. 1908년 4월 차도선이 귀순했을 때, 일본군은 의병 대다수가 화승총으로 무장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의병대의 주력인 산포수들이 평생 맹수를 사냥하면서 탁월한 사격 숙련도를 갖췄고,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은신을 잘했던 점도 주요 원인이었다.

함경도내 일본군은 의병 활동 전해인 1906년에 순사주재소나 헌병분견소 같은 기관 당 17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1908년에는 경찰 2천여 명, 헌병 5천 500여 명으로 증가했지만, 기관당 인원은 오히려 각 12명으로 감소되었다. 인원을 3배 이상 증가했지만 기관을 설치해야 하는 장소가 4배 이상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지비용이 증가했고, 수송비용을 비롯하여 보급을 위한 비용과 비전투 환자가 급증했으며, 치안은 갈수록 불안해져 내륙 도로를 이용하는 물류비용은 갈수록 증가했다. 이에 일본군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908년 6월, 연대 단위의 대규모 부대를 북부 수비구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1908년 6월 25일 북부수비관구에 제27연대를 증파하였고, 토벌 책임자로 오타(太田) 보병 대좌를 임명했다. 또한 의병이 해상으로 도주하는 걸 막기 위해 노모토(野本)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군함을 청진 지역에 배치했다.

그러나 토벌의 성과는 매우 미흡했다. 토벌대는 1908년 7월 '동부 수비구 대소토 결과 보고서'에서 홍범도 의병대가 와해되었고 정도익이 인솔하는 일부 의병부대만 남아 활동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달랐다. 홍범도 의병대는 1908년 7월 18일 홍원 전진포에서 부패관리 홍원군수 집을 급습하여 일본 돈 3만 7천엔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고, 7월 21일에는 북청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함흥수비대와 격전하여 16명을 사살하고 소총 16정과 탄약 6상자를 노획했다. 많은 일진 회원은 홍범도를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의 습격으로 척살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일본군 주둔지 인근 지역으로 피난했다. 함경도민들은 홍범도에게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붙였고, 일진회를 비꼬는 노래를 지었다.

회야 회야 일진회야


삼춘화류 종다더니

사절 명절 다 자닜다.

오색 잡놈 모여들어

육조 앞을 지나가니

칠국거지 너 아니냐.

팔자도 기박하나

구구히 사잤드니

10월 치성 가련하다.

모자 벗어 코에 걸고

천리원주 네가 할 제

상투 생각이 너 안나더냐.

- 일진회가

일본군은 지지부진한 토벌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했다. 1908년도 군대 파견비가 50만원이었으며, 1909년 예비비에서 폭도 진정비로 2만 2천 500원을 추가로 지출했다. 경찰력 증가에 따른 비용은 한국이 부담했지만, 일본군 주둔 비용 및 의병 토벌 비용은 일본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일본군은 운송비용의 절감을 위해서 짐의 수를 제한하는 등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촌송법’을 하달하여 예산 절감을 규정화 하였다. 그렇지만 의병의 출몰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광범위한 지역에 계속해서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비용 상승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군화 보급과 같은 필수적인 보급조차 중단하고 자체적으로 짚신 등을 조달하여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의병에 대한 탄압 전략을 수정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토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은 민중이 의병을 지원하기 때문이었으니, 군사적 토벌 위주의 전략에서 탈피하여 의병과 민중을 격리시키기로 한 것이다. 일제는 1907년 12월 귀순조칙과 함께 귀순자조례를 발표하여 의병들이 일제의 군경기관뿐만 아니라 선유위원과 행정기관에서도 귀순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귀순증을 발급했다. 귀순자 처리에 있어서 보증인을 세우고 만약 문제가 발생시 보증인이 대신 할복과 같은 처벌 받도록 하였고, 일제에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따라서 주요 보증인이었던 부윤과 같은 지방관리들은 적극적으로 선무 및 귀순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또한 일제는 귀순 의병들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이들이 의병에 다시 가담하는지를 엄중히 감시했다.

의병 투쟁이 장기화되고 겨울로 넘어가자, 많은 의병이 일본의 귀순 정책에 넘어갔다. 홍범도와 함께 공동지휘를 맡았던 차도선 역시 이러한 기만에 넘어가 귀순하기로 했다. 1908년 3월 6일, 차도선은 양혁진과 함께 부하 250명을 인솔하여 일본군 수비분견대가 있는 신풍리에 주둔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회담을 가졌다. 차도선은 부하 537명의 명단을 제출했고, 일본군은 귀순증을 발급했다. 이때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단행하자, 차도선의 부장 태양욱(太陽郁)은 저항하다 총살당했다. 차도선은 뒤늦게 자기가 속았다는 걸 깨닫고, 기회를 틈타 의병대에 복귀했다. 한편 일본군은 홍범도를 잡기 위해 부인 이옥구를 붙잡아 모진 고문을 가하며 회유하였지만, 이옥구는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에 서명하지 않았고,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와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장남 홍양순도 1908년 5월 28일 정평배기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제는 이와 함께 자위단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자위단은 일진회가 일제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창설한 조직으로, 의병의 침입을 막고 그 소재를 수색하는 순라와 경계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들을 토벌대에 참여시켜 민중 속에서 의병을 색출하는 데 활용했다. 한인 순사 역시 그들의 유용한 활용 도구했다. 1908년 7~9월 사이에는 한국인 부랑자 4,065명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함으로써 2,400명이었던 헌병 규모를 약 6,500명으로 증강시켜 의병탄압의 최일선에 투입하였다.


홍범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차도선이 일제에 귀순한 뒤 독자적으로 읩여대를 지휘하며 부대를 재편성했다. 전체를 단일부대로 편제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규모 중대 단위로 담당 지역과 임무를 각각 부여하였다. 또한 각 단위부대의 조직은 의병장 밑에 부의병장·검사·유사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단위는 분대·소대·중대로 조직하였다. 단위 부대간 연락을 담당한 ‘유사대’라는 특수조직을 편성하여 부대간 지휘통제 체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탄약과 탄환 보급을 철저히 막아서, 홍범도 의병대는 탄약 결핍에 시달렸다. 홍범도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군의 전투 물자를 탈취하여 탄약을 확보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양을 확보할 수 없었다. 갑산 지역의 동점에서 체굴되는 구리를 재료로 탄환과 구식 대포를 만드는 등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탄약을 마련하기 위해 1908년 5월 김충렬 등에게 2만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줘서 연해주에 파견해, 이범윤으로부터 탄약을 구매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고 가져갔던 군자금을 모두 탕진했다.

8월 초순, 임재춘, 정일환 등을 간도에 파견하여 탄약을 구매하도록 하였지만, 두 사람은 가져갔던 군자금을 다른 곳에 유용했다. 홍범도는 변해룡을 재차 투입하여 임재춘과 정일환이 임무를 완수하도록 독촉하였다. 하지만 변해룡은 임재춘 등이 돈을 이미 유용한 것을 파악하고 포기하고 잠적해 있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해외에서 탄약을 구하려던 시도가 모두 실패하고, 보유하고 있던 탄약마저 고갈되자, 홍범도는 직접 연해주로 가서 탄약 조달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연해주 지역에 별다른 기반이 잡혀있지 않았던 홍범도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결국 그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함경도로 돌아갔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갑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분전했지만, 1910년 5월 초순 함경북도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패배했다. 이제 함경도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이대로 일본군을 피해 계속 도망만 다니느니 국외에서 새로운 근거지를 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1910년 5월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의 항일운동[편집 | 원본 편집]

홍범도는 연해주에 도착한 뒤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했다. 1910년 6월 결성된 이 조직에서, 이범윤이 창의군 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 총재, 유인석이 도총재, 이상설이 외교통신원을 맡았다. 그는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었다. 13도 의군은 고종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 파천할 것을 건의했다. 1910년 8월경 구춘선이 지도하는 대한국민회와 손잡고 군자금 모집 및 독립군 인적 수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50여 명의 민족운동가들과 함께 조국 독립의 결의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1910년 9월 일제의 요구에 의해 러시아가 홍범도 등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하면서, 13도 의군은 해체되었다.

몇달 후 석방된 홍범도는 한인들에게 독립투쟁의 교육을 장려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식이 한인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11년 5월 20일 권업회(勸業會) 창립에 참여해 부회장, 사찰부장을 맡아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힘썼다. 또한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해 회장을 맡아 1913년부터 3년간 연해주 일대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드로가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로 진공할 기회를 엿봤다. 무장 투쟁을 위한 ‘광복군’ 양성을 위해서 1913〜1914년 만주 나주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8년 3월, 홍범도는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정치망명자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이동휘가 "볼세비키 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이동녕 등 이동휘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회의석상에서 탈퇴하고 전로한족회대회가 열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떠났다. 반면 이동휘의 제안을 지지하는 이들은 1918년 5월 11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인물 중 한 명이자 한인사회당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인섭에 따르면, 홍범도는 한인사회당이 창립될 때 하바롭스크게 있었고, 많은 사람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추풍당어재꼴에 가서 있다가 왜놈들과 전쟁이 시작되면 의병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여러분들이 조직하려는 혁명당이 시키는 대로 전투하겠다는 것을 맹세한다.

이후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을 때 군대 모집을 위해 수이푼 지방으로 떠나면서 자기가 가지고 왔던 약담배 뭉치를 당조직 경비에 쓰라고 하며 이동휘에게 맡기고 갔다고 한다. 그 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독립전쟁을 전개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홍범도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8년 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 일듯 함으로 농사고 뭐고 나가자 하고 묻어 두었던 총을 끄집어 내여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모집과 탄환모집

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다나니 1919년 8월 8일에 밤에 떠나 앵덕이 106인이 무장을 메고 앵덕에 당진하니 (후략)

홍범도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해 8월 군무부 소속 군대 일부를 인솔해 간도로 이동했다. 이후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내어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을 갖췄다. 과거 의병부대 편성과 마찬가지로 부대를 1개 소대는 50명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사령관은 홍범도,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이 부임했디.

대한독립군은 그해 8월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공을 감행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금정주재소 등을 습격하였고,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해서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후 1920년 초반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시행했다.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장기 체류하던 체코 군단과 접선했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지자 남아도는 무기를 모조리 처분했다. 독립군은 이들로부터 확보한 무기를 통해 보다 신식화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독립군의 국내 진공이 갈수록 빈번해지자, 일제는 만주로 군대를 파견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여명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에 일제는 니이미(新美) 중위의 인솔하에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되었다. 이에 일본 제19사단 소속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 약 250명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으로 진격했다.

이에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국민회군의 안무 등이 연합한 대한군북로독군부는 고려령(高麗嶺) 부근에서 한 차례 기습한 뒤 봉오동 골짜기까지 철수했다. 또한 지휘체계를 재편성해 최진동이 사령관을 맡고 홍범도는 연대장을 맡았으며, 안무는 사령부 부관이 되었다.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서 전위중대를 내보냈으나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받고 피해를 입었다. 10시 30분경에 다시 부대를 진격해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숨을 죽이며 모든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 안에 들어오길 기다렸다. 오후 1시경 모든 일본군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했다. 일본군은 기관총을 쏘며 반격했지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독립군의 분전으로 피해를 입고 3~4시간만에 퇴각했다. 일본군은 남쪽 735고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독립군과 교전했고, 6월 9일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 건너편의 두만강변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주고 승리했다고 한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전사자 1명, 부상자는 2~10명이었다고 한다. 사실 6월 22일에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에는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구,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 고 기재한 것을 보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세력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일본군의 사상자 수를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일본군이 독립군 섬멸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복수하려 들 것을 예상하고, 최진동의 부대와 이탈한 뒤 8월부터 명월구를 거쳐 어랑촌으로 이동하였고, 국민회의 안무 부대와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도 곧 그곳에 도착했다. 김좌진의 대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끝난 뒤 서일 총재를 비롯한 일부 유수부대만 남겨놓고 600여 명의 기본 부대를 2개 대대로 나눠서 9월 18일부터 연길현 삼도만 세린하, 장인강을 거쳐 10월 10일경 청산리 어구인 송월평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홍범도의 의용군단, 국민회,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 등과 함께 기지를 세워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뜻밖의 손실을 입은 것에 격노하여 1920년 8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혼춘 사건을 조작했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중국 측의 답변이 오기도 전에 대규모 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했다. 일본군은 조선군 중에서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병력을 차출하고, 시베리아 연해주 주둔군인 제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 중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초토부대를 편성했다. 그들은 단발식 무라다 소총과 연발식 무라다 소총, 30년식 소총과 38식 소총, 중(重)기관총과 사거리가 10km에 달하는 야포를 보유했다.

이후 독립군을 지원하던 한인들을 상대로 간도 참변을 자행하던 일본군은 독립군이 청산리 방면에 모였다는 첩보를 접하고 0월 12일 조선 주둔 19사단 37연단장 아즈마 소장이 영솔하는 73연대 3개 대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 기관총 6개, 보병포 2개, 공병 대대 등의 병력을 파견했다. 또한 10월 13일에는 야마다 대좌가 인솔하는 보병 3개 중대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이 이도구를 거쳐 팔가자까지 진입했다. 당시 홍범도 부대는 어랑촌 인근의 이도구에서 주둔했다. 그러다 일본군이 접근하자 어랑촌 남단의 산악능선을 이용하여 완로구를 경유, 안도현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일본군의 진출속도가 빨랐다. 그들은 야간에 이동하여 새벽녘에 완로구에 도착하여 수색을 개시하였다.

홍범도는 완로구 산야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기습 공격을 하였지만, 전력 보존을 우선시하였기에 적극적인 공세는 가하지 않고 삼림으로 깊숙이 철수해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쳤다. 이후 완로구를 경유해서 안도현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어랑촌을 지나 천보산 또는 청산리 방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들이 어랑촌에 이르렀을 때,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는 상황이 포착되었다. 홍범도는 곧장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이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어둠이 깔려서 상호간에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그 틈에 철수하기로 했다.

10월 22일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전투 중 기징 격렬한 전투였고, 양측간에 일정한 손실이 있었다. 그후 김좌진은 청산리를 거쳐 연해주로 후퇴하였고, 서일이 인솔하는 잔류부대는 서대파 부근과 라자구, 노무주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뒤 본대를 따라갔다. 한편 홍범도 부대는 신속히 천보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안도현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거기에는 이미 일본군 1개 중대가 길목상에 배치되어 통로를 차단했다. 홍범도는 최대한 전투를 회피한 상태에서 통과하고자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방어 배치가 되어있는 그들을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시 청산리를 경유하여 안도현 방향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후 고동하곡 인근까지 이동하면서 야마다 지대 추격대의 공격으로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이 느슨했기 때문에 청산리에서 빠져나와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의 손실이 전사 60명, 부상 90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손실에 대해서는 초기엔 가노 기병대장 이하 950여 명이 사상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이후에는 1,200~3,000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에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이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전과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주장과 일본군이 피해를 축소하였다는 주장이 현재까지 대립하고 있다.

자유시 참변[편집 | 원본 편집]

청산리 전투 후, 홍범도는 1920년 12월 말 러시아-중국 국경인 밀산에 도착한 뒤 서간도에서 이동해온 서로군정서군, 광복단, 그리고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와 통합하여 '통의부' 또는 '대한독립군'으로 불리는 통합부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는 1921년 1월 초 연해주 이만으로 넘어갔다. 이보다 한달 앞서 최진동의 도독부와 안무의 국민회군, 허재욱의 의군부가 자유시로 넘어가 있었다. 당시 한인 무장부대들은 소비에트러시아정부 및 극동공화국과 일정한 교감 아래 시베리아의 자유시에 모여 극동공화국의 지원 아래 대규모 통합부대를 결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에서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 무장부대들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간도로부터 연해주 이만으로 옮겨온 독립군부대들을 최종 목적지인 아무르 주 자유시로 이동시키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만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는 제2아무르군이 준비한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하나둘씩 자유시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외교상의 이유와 치안유지를 위해 무장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받자, 무장 해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다시 간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홍범도 등은 자유시로 가기로 했고, 실제로 소련군은 자유시에 도착한 부대들에게 무기를 다시 돌려줬다. 1921년 3월 초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의 군인 총수는 대략 2,000명이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들의 통합 문제에서 주도권을 쥔 부대는 박일리아의 니항부대였다. 그들은 1920년 1월 20일 극동공화국 정부 소속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허로부터 "인민혁명군 안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를 즉시 특립사할린 빨치산부대로 재족하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니항부대를 주축으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조직되었고, 박일리아가 군정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자유시로 온 독립군을 빨치산부대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한편 1921년 2월 10일에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전한의병대회 소집을 위해 한인부는 소집위원회를 구성했다. 소집위원회의 노력으로 1921년 3월 1일 자유시에서 전한의병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되었다. 대회규정에 따르면, 대표자는 병사 150명당 1명, 250명인 부대는 2명씩 선출하며, 각 부대의 군정위원들도 대회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각 빨치산부대에 자신들의 정보를 담은 설문지를 작성하여 늦어도 2월 15일까지 제출하도록 했다. 1921년 3월 1일에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전한의병대회는 3월 중순경에 마자노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중러 양령에 있는 의병 수만명의 병대를 단합시켜 일본 제국주의군대를 격퇴하기 위해 각 군대를 관리할 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 이 위원회는 자신을 “각 의병대 의사에 의하여 상당한 적법으로조직한 군사위원회”라고 주장하고,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기위하여 이용을 파견했다. 전한의병대회의 개최와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의 창설로 간도와 연해주로부터 온 한인 무장부대 대부분은 전한군사위원회의 지휘아래 마자노프로 이동하여 사할린부대 중심의 무장부대 통합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자유시에 주둔한 무장부대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자유대대를 무시하며 개최된 이 대회는 오히려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분열시켰다. 이만 군대의 김 표도르, 국민회군의 김규찬, 강석진, 김광 등은 자유대대의 김하석, 최고려 등과 함께 극동공화국 정부에 직접 교섭하기 위해 치타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치타에서 특별한인군사협의회를 개최하여, 최광윤을 의장으로, 최성우와 김규찬을 서기로 하여 극동국 한인부 박애, 자유대대 이평형, 간도 독립군부대 김광, 이만-간도부대 김 표도르, 그리고 박밀양이 참석했다. 협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를 러시아 정규연대로 재편성하고 “극동보병민족혁명연대”로 부를 것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사할린빨치산부대 조직의 근거가 되는 제37호 명령을 취소해 줄 것을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에게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대장에 오하묵, 군정위원에 최성우를 임명하기로 하고 사할린빨치산부대 사령관 김 인노겐치와 군정위원 박일리아를 직위에서 해임해 군사법정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한인부와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서는 이와 같은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극동국 한인부는 곧장 이 협의회에 참가했던 대표 3인(박애, 최성우, 박밀양)을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치타에서 특별한인군사협의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협의회에 참석했던 최광윤, 김 표도르, 김광 등은 오하묵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당시 이르쿠츠크에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에 의해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참가했다. 이후 전한군사위원회는 군정의회와의 대립 속에서 점차 여타 무장부대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가게 되었고 결국 통합의 주도권을 군정의회에 넘겨주었다.

1921년 3월 중순, 러시아 빨치산 운동의 핵심 장성인 칼란다리쉬빌리(Н.А.Каландаришвили)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김하석과 최고려를 위원으로, 오하묵을 부상령관으로 하는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소련의 5군단 산하 카프카즈 기병 600여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여명이 부속되었다. 그리고 우선 오하묵을 임시사령관으로 하여 자유시로 출발했다. 이들은 먼저 치타에 도착하여 극동공화국 군부와 한인부에 군정의회결성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난 후 5월 2일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크라스노야로보에 주둔하고 있던 자유대대를 자유시로 돌아오게 하고 하바롭스크 제2군단에게 사할린부대를 군정의회에 인계할 것을 교섭했다. 이렇게 하여 자유시에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가, 마자노프에는 전한군사위원회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임시궁정의회는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48) 6월 6일 칼란다리쉬빌리가 카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칼란다리쉬빌리였고, 두 명의위원은 최고려와 유동열이었다. 극동비서부에서 전권위원으로 오홀라가 동행했다. 그는 슈먀츠키로부터 극동공화국 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았다. 이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는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으로 방향을 돌렸다. 홍범도는 6월 2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안무와 최진동도 6월 9일 뒤따라 갔다. 이는 곧 사할린 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홍범도 등이 이런 선택을 한 건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를 인정하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협조하기로 한 데서 비롯되었다. . 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 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카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간도의 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또한 마자노프에 있던 사할린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카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그리고 6월 19일 무장부대 통합을 위한 모든 한인 무장부대의 군간부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300여명 정도가 참여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으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결정안을 공포하였고, 그동안 통합을 저해해왔던 사할린 부대에 대한 사면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할린 부대가 주축이 된 대한의용군이 끝까지 합류를 거부하자, 6월 28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9연대의 도움을 받은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36명이 끝까지 저항하다 사살되었고, 864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다.

체포된 이들 중 죄질이 무겁다고 인정되는 500여 명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니항부대의 군인들이었다. 또한 간도로부터 온 독립군부대의 병사들 중 자유시로 옮겨오지 않고 사할린부대에 남아있던 군인 364명은 군정의회 군대에 편입하여 고려혁명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500여 명 중 범죄행위에 가담했다고 인정된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군단에 인계되었다. 그들은 이후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Ушумун) 벌목장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강제노동은 1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 같다. 1922년 8월 1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이들이 여전히 노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여기서 탈출한 이들 중 20여 명은 중국령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중국군에게 적군이라고 총살당했으며, 다른 5명은 겨우 러시아 농촌에 도착했으나 야간에 떡을 걸식하려다 절도의 혐의로 피살당했다고 한다.

나머지 72명은 중대범죄자로 분류되었다. 주로 장교 신분이었던 이들은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한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도중에 최니콜라이를 비롯한 7명이 차량 바닥을 뜯어내고 철로로 뛰어내렸다. 그 과정에서 최 니콜라이와 한권길은 열차에 두 다리를 잘려 숨졌고, 박그리고리, 김 인노겐치는 다시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고, 박춘봉, 박니콜라이, 함파벨 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이들에 대한 재판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고려혁명군의 기관지인 <붉은군사>에 이 재판의 결과가 게재되었다. 재판위원장은 채동순이었으며, 위원은 홍범도와 박승만이었다. 1921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 동안 자유시사변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은 사람은 50명이었다. 이들 중 3명에게 징역 2년, 5명에게 징역 1년, 24명에게 1년간 집행유예, 17명은 방면하여 군대에 종사케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1922년 8월에 작성된 <재노고령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이에 따르면, 고려군사혁명법원의 위원은 김철훈, 이성, 채성룡 3인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먼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간부이던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이들에게는 반혁명죄가 적용되어 박애는 징역 8년, 나머지는 징역 5년에처해졌다. 다음 자유시사변으로 잡혀온 장교와 군인 72명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그 결과 그리고리예프, 김민선, 최 빠벨, 박 그리고리 등 4명에게 반란죄로 징역 2년이 선고되고 나머지는 즉시 석방했다. 박 그리고리는 이후 믿을 수 있는 이의 보증에 의해 석방되었다.

전북대학교 사학과 윤상원 교수는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에서, <연혁>에 나오는 3명은 고려군사혁명법원이 만들어진 초기 위원으로 추정되며, 이후 자유시 참변으로 잡혀온 이들에 대한 재판 위원은 <붉은 군사>에 언급된 박승만, 채동순, 홍범도가 맞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했던 고려군사혁명법원은 고려혁명군 안에 조직된 것이므로, 위원장은 고려혁명군에서 정치사업을 담당하는 군정위원을 맡는 게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증언에서 홍범도가 군사재판의 위원을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홍범도는 한인빨치산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던 명망과 권위 때문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을 것이다. 또한 윤상원 교수는 판결 내용 역시 <붉은 군사> 쪽이 신빙성이 더 높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반역죄'라는 무거운 죄명이 씌어진 것에 비하면 처벌이 약한 편인데, 이는 1921년 11월 27일~30일 코민테른이 결정한 '11월 결정서'에서 비롯되었다. 결정서는 자유시사변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고 “자유시사변에 관련되어 투옥된 80여 명 중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를 석방할 권한을 조사위원회에 위임”했다. 그래서 재판에서 가능한 한 신속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었고, 이로 인해 처벌 수위가 대폭 낮춰진 것이다. 여기에 1922년 4월 이르쿠츠크 회의에 의해 제명된 당원들을 복원한다는 결정서가 발표되면서, 상해파 인사로서 자유시 참변에 연루된 인사들이 사면되었다. 그래서 <연혁>에서는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단지 3명이라고 기술된 것이다.

홍범도는 <홍범도 일지>에서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사할린부대 출신 인사들로부터 심히 원망받았다. .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 온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당시 칼란다리쉬빌리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두 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과 칼리닌 등의 증명서를 얻어 석방되었다.

소련에서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면담한 뒤 금화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 권총을 선물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독립군을 해산하라는 요구를 소련이 받아들이면서, 공산당에 소속된 독립군이 모두 무장해제되었다. 그 후 연해주의 사인밭으로 가서 3년간 농사를 짓고 양봉 알쩨리(협동조합)을 조직하여 2년간 운영하였으며, 1926년 이인복과 재혼하였다.1923년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10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9년 환갑이 되어 정년퇴직하고 한인부대 명예군인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 10월, 이오시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동포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처음에는 카자흐스탄 얀쿠르간 지방의 사나리크 셀소비에트(농촌소비에트)로 이주되었지만, 한인 콜호즈가 이주 정책을 주관하던 관리들에게 "이 분은 고령이시라 황무지에선 살기 곤란하니 도시에서 살게 해달라"고 청한 게 받아들여져, 이 일대의 유일한 도시인 크즐오르다 시에서 살게 되었다. 그가 크즐오르다 시의 어느 주택에서 거주했는지는 현재까지 확실하지 않다.

2008년 8월 26일 연합뉴스 알마티 특파원으로 있던 유창엽은 홍범도 장군 탄생 140주년을 하루 앞둔 2008년 8월 26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인 관련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던 고려인 작가 정장길(鄭長吉) 씨가 그간 소장해온 1968년 8월 27일자 <레닌기치>의 홍범도 특집기사를 접수한 뒤 국내에 알렸다.[2] 이 기사는 대중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신문사들도 앞 다투어 이 기사를 인터넷 기사로 실었으며, 사람들은 홍범도의 말년을 비통해 했다.

하지만 홍범도가 말년을 빈곤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물론 그가 고려극장 수위장을 맡았던 건 여러 기사와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지만, 당시 홍범도는 러시아 군부로부터 80루블의 연금을 지급받고 있었으며, 고려극장으로부터 50루블을 추가로 받았다. 무일푼인 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인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고려인 모두가 강제이주 직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여건이 조금은 좋은 고려극장이 홍범도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안정적으로 고려인 사회의 큰 어른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고려극장에 ‘어떤 직함’이든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 당시 고려극장의 총 연출가겸 희곡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지원하면 회계 감사 때 지적될 테니, 수위장이라는 직함을 걸어놓고 50루블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었다. 고려극장이 1942년 4월 탈듸-쿠르간주 우슈토베로 이주했을 때, 홍범도는 따라가지 않았다. 생계를 목적으로 수위장으로 일했다면 당연히 따라갔을 것이다. 이로 볼 때, 홍범도는 말년을 수위로 지내며 쓸쓸하게 지낸 게 아니라, 한인들로부터 나름 우대받으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한인들을 위로하며 지냈을 것이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홍범도는 <레닌기치>에 글을 투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1919년 10월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이동했을 때 러시아 적군 빨치산 병사들과 만났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러시아 백군에게 쫓기던 빨치산 3명을 구하고 백군 십여 명을 사살했음을 밝히며, 고려인 청년들에게 무기를 잡고 전쟁에 참전할 것을 촉구했다. 또, “변절자들이 우리 사이에 있었으며 또는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의 냉정한 탄환은 외부의 원쑤와 내부의 원쑤를 함께 없이하여야 한다”며, 내부의 적 분쇄를 강조했다. 그 후 1943년경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하다가 10월 25일 사망했다. <레닌기치> 1943년 10월 27일에 정미공장 일꾼 일동이 부고 기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크질 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

사후[편집 | 원본 편집]

홍범도가 사망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에 장례를 크게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유해를 집 근처에 임시로 묻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중앙공동묘지에 이장했다. 김기철의 <홍범도 장군의 전투경로와 쏘련에서의 만년생활>(레닌기치 1989년 4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크즐오르다시 소비에트는 홍범도가 살던 거주지 인근의 한 거리를 '홍범도 거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홍범도 사망 8주년인 1951년 10월 25일 분묘가 무너진 상태를 목격한 크즐오르다의 고려인들이 레닌기치 신문사의 주필 남해룡, 부주필 염사일 등과 협의하여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으로는 홍범도 장군의 전우인 박성태, 심상원과 친우인 전경팔, 항일투사 이인섭, 레닌기치 신문사 직원 이인 등이었다. 이 위원회에서 크즐오르다 고려인들의 기부금, 레닌기치 신문사 사원들의 기부금, 칠리 구역의 선봉 콜호즈 회원의 성금으로 시멘트로 된 분묘와 분묘를 둘러쌀 철책과 철로 된 비를 세우고 10월 25일 건립 기념식을 가졌다. 분모 앞에 세운 비의 앞면에는 다음 글이 적혀 있었다.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18968년 8월 27일 출생 1943년 10월 25일 사망

후변에는 다음 글이 적혀 있었다.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

1996년 홍범도 기념공원이 크즐오르다 시에 조성되었으며, 2010년 4~5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지원 및 크즐오르다 시 기업인들의 제의로 홍범도 기념재단에 의해 보수 및 재구성되었다. 또한 크즐오르다 시 고려인협회의 주도로 계봉우의 아들 계학림(계 니콜라이)을 비롯한 고려인들이 홍범도의 묘역을 관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후 유해 봉환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었지만, 북한이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도 평양에 있으므로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차질을 빚었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카자흐스탄 정부에게 홍범도 유해를 평양으로 이송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는 북한 정부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유해 송환을 추진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지속적인 협조 요청 끝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그해 12월 한국을 방문한 뒤 유해 봉환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해 봉환은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지연되다가 2021년 8월경 확정되었다. 북한은 고향인 평양으로 모셔야 하는데 남한으로 빼돌렸다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카자흐스탄과 대한민국 모두 무시했고 고려인 사회 역시 "핵무기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인민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건네줄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홍범도는 무장투쟁론을 대변하며 무장투쟁이 가장 실질적이며 효과적 독립운동 방법론임을 실증하며 몸소 싸웠다고 하는 점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라고 하겠다. 홍범도는 의병및 독립군 지도자였고, 막강한 실질적 전투력을 가진 독립군 부대를 이끌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당국과 일본군경.관헌등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홍범도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함경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치열한 한일투쟁을 하였다. 2021년 8월 14일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대표로 하는 특사단이 카자흐스탄에 파견되었고, 8월 15일 홍범도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에서 출발하여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그 후 봉환식이 거행되었고, 8월 17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김주용,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과 역사적 의의>, 인하대학교, 2014.[1]
  • 신효승,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2012.[2]
  •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회, 2017.[3]
  • 홍응호, <홍범도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 수선사학회, 2017.[4]
  • 오세호,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의 정체성과 홍범도 인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5]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6]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 내일을 여는 역사 전문잡지 내일을 여는 역사 제6호 2001.09 182 - 190 (9page)

각주

  1. 몰락한 양반가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불명확하다.
  2.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쓸쓸한' 말년 - 연합뉴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현실 학술저널 역사와 현실 제121호 2021.09 3 - 30 (28page) DOI : 10.35865/YWH.2021.09.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