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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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素昻. 본명은 조용은(趙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는 소앙(素昻).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교하군(現 [[파주시)]) 월롱면에서 부친 조정규(趙禎奎)와 모친 박필양(朴必陽) 사이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함안 조씨 [[양반 가문으로, 조부 조성룡(趙性龍)은 정삼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6세 때인 1892년부터 조부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사서삼경을 익히며 과거를 준비했다. 이무렵 맏형인 조용하(趙鏞夏)는 개화사상에 감화되었고,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를 지지하였다. 그는 맏형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전수받고, 조선을 서양과 대등한 근대국가로 육성할 꿈을 품었다.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자로 입학한 그는 신채호와 교우 관계를 맺었다.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한 뒤 그해 7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남선, 최린과 함께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여 근대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공원에서 을사조약에 불복하여 순절을 택한 민영환, 조병세 등 7충신을 추모하고, 을사오적 및 일진회의 매국 행각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었다. 그해 12월에는 도쿄부립제일중학교 교장 카츠우라 헤이오(勝浦炳雄)가 한국인을 무시하자 이에 반발하여 동맹휴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조소앙을 포함한 한국인 학생 37명 전원이 퇴학 처분을 받았지만, 일본 문부성의 권유로 1906년 3월 재입학하여 1907년 3월 졸업했다. 1906년 도쿄 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는 데 참가하여 평의원 겸 회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는 당초 일본을 한국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근대국가로 봤지만, 점차 이러한 시각을 버리게 되었다. 특히 졸업을 며칠 앞둔 1907년 3월 28일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일본 학생들의 한국 황실에 대한 토론회를 청강하던 중, 일본 학생들이 한국 황제를 일본 왕실 아래 신분인 화족[1]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자 크게 분개하여 항의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이 일에 큰 충격을 받아 3월 31일 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헤이크 특사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때 일본 호우치(報知) 신문은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황위를 폐위할 뜻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찬동한다는 뜻을 담은 3건의 선언서를 본국 사회와 세계 각국에 알리기로 했는데, 그중 2건은 조소앙이 기초한 문건을 채택했다. 조소앙은 당시의 심경을 본국 동포에게 전하기 위해 ‘재일본 시담생(嘗膽生)’ 명의로 <통곡하며 본국 동포에게 알린다(痛哭告于本國同胞)>를 대한매일신보에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은 첫째 청일전쟁을 일으켜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것, 둘째 러일전쟁을 일으켜 보호국화한 것, 셋째 고종 황제를 강제 폐위시키려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것 등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이번에 체결한 한국신협약의 문구는 역시 평범하고 온화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병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조소앙은 이렇듯 1907년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관점을 ‘이상적인 근대문명국’에서 ‘음흉하며 배신을 일삼는 위험한 나라’로 바꾸었다. 이때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고 이에 큰 관심을 품었다. 1907년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 세력은 러일전쟁 반대운동을 펼치며 성장한 초기 사회주의 세력과 아나키스트들이었고, 이중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였다.

그는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와 함께 1903년 11월 ‘평민사’를 설립하여 주간 <평민신문>을 발간하면서 러일전쟁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신문 발간사에서 인류의 자유를 위해 ‘평민주의’를, 평등의 복리를 누리기 위해 ‘사회주의’를, 박애의 길로 가기 위해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조선, 만주와 시베리아를 얻게 된다면 이익을 얻는 집단은 정치가나 자본가계급일 뿐이다. 지위나 자본이 조금도 없는 대다수 노동 인민은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정부는 반전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평민신문을 폐간하였고, 1905년 2월 고토쿠 슈스이를 체포하여 5개월간 가두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옥중에서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을 접한 뒤 아나키스트로 전환하였고, 1905년 11월 미국으로 출국해 당시 노동조합운동을 이끌고 있던 엠마 골드만의 생디칼리즘에 큰 감명을 받은 후 귀국하여 아나키스트가 되었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1907년 평민사를 재건해 <일간평민신문>을 발행하였고, 매주 금요일 강연회를 열어 노동자의 직접 행동론을 주창했다. 슈스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과 중국 및 인도, 필리핀, 베트남 등의 아시아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를 조직했다. 이 모임에 참여하던 중국인 유학생 판보이쩌우는 회고록에 참석자 명단을 기재했는데, 그중에는 조소앙도 있었다. 이로 볼 때 조소앙이 한인 유학생을 대표하여 아주화친회 활동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소앙은 1907년 11월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수료하였고, 1908년 3월 메이지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해 1909년 7월 과정을 마친 후 9월 13일 법학부 본과에 입학했다. 1909년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의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의 주필을 맡았다. 그러던 1910년 일진회 등 친일단체들이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조소앙은 일기에 “참담하고 음울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대한흥학회 명의의 합방 성토문을 집필하였고, 윤치호, 김규식에게 합방을 반대하기 위한 국내조직 결성을 위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1910년 8월 2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20여 일간 심문을 받았고, 석방 후에는 형사들의 미행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상태를 “마음과 정신 파열된 듯”, “심리상태 우울” 등으로 표현하였다.

일제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한일병합 후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던 조소앙은 기독교에 입교하여 1911년 10월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유교의 사서삼경, 성경, <석가모니소존>, <쇼펜하우어의 철학> 등 동, 서양의 종교 및 철학을 탐구하여 삶의 방향을 나름대로 정립했다. 그는 점차 학업에도 적응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1912년 7월 메이지대학 법학부 과정을 무사히 졸업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품었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은 건 일본 유학시절부터 중국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동향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게 컸다. 특히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은 그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일기에는 1911년 신해혁명을 전후로 중국 관련 이야기가 25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언급된다.

무직업자에게는 일본 형사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일단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잇달아 교사를 맡았다. 그러던 중 1905년경에 베이징으로 망명했던 맏형 조용하가 1913년 만주에서 이상룡,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를 설립한 후 자신에게 소식을 알리자, 그는 이에 고무되어 망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13년 베이징으로 망명하였고, 사전에 연락했던 신규식의 초청에 따라 상하이로 이동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뒤 성균관 동료인 신채호, 앞서 연락을 취했던 신규식, 그리고 박은식, 홍명희와 만나 동제사(同濟社)의 간부로 활동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가 되었다. 또한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중국 국민당원인 다이지타오의 소개를 받고 쑹자오런, 천치메이, 천궈푸 등 신해혁명의 주역들, 그리고 아나키스트 언론인 황줴 등과 교제하였으며, 신규식, 박은식 등 한국 인사들과 중국 인사들이 신아동제사사(新亞同濟社)를 창립할 때 참여했다.

조소앙은 아시아 각지의 인사들이 통합된 운동을 벌이려면 세계 통합적 종교를 제창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914년 1월 세계의 대표적인 성현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일신교’를 설립했다. ‘육성교(六聖敎)’라고 불리는 일신교는 단군을 비롯해 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 여섯 성현의 가르침을 요일별로 하나씩 6일간 반복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육성일체(六聖一體)’를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세계 통합적 종교를 통해 개인 인격의 완성과 민족의 독립, 나아가 세계평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소앙은 뒤이어 동생 조용주(趙鏞周)와 함께 국민당 원로들과 만나 ‘아세아민족 반일 대동당’을 조직했다. 1916년에는 언론인 황줴 등과 함께 대동당 결성을 추진하여 중국과 타이완, 인도, 태국, 베트남, 이란 등 7개국 인사들과 총 단결을 모색하고자 했다. 메이지대학 유학 동지인 황찌에민(黃介民)은 조소앙의 모든 활동에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는 신아동제사는 물론 ‘아세아민족 반일 대동당’ 조직 당시에도 발기인으로 나섰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할 때에도 적극 도왔다. 1915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한 신아동맹당의 조직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1917년 조소앙을 경성에서 비밀리에 만나 조선지부를 만들기도 했다. 황찌에민과 조소앙은 그해 12월 28일 다시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 베트남의 응우옌하이탄, 이란의 이석석(李石石) 등과 회합해 신아동맹당의 본부를 상하이에 두기로 결의하고 반제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신아동맹당의 황찌에민은 1919년 4월 11일 조소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때에도 지지하여 한중연대 활동을 펴는데도 적극 후원하였다.

1917년 7월,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여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하고 각계 인사에게 발송했다. 이 선언문은 주권재민론과 대동사상에 기초한 독립선언이었다. 그 강령에는 ‘독립과 평등은 성스러운 권리’임을 주장하면서, 해외 각지에 현존하는 단체는 대소를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을 조직하고자 제청하였다. 또한 헌법을 제정하여 민정에 부합된 법치를 실행할 것과 국민적 외교의 실행을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그해 스웨덴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당대회가 열리게 되자, 긴급히 조선사회당을 창당한 뒤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주권민유론’·‘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 등 한국독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취지서를 작성하여 조선사회당 명의로 한국독립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였다. 국제사회당대회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독립문제를 정식 의제로 삼았다.

1918년 만주 길림성으로 이동한 그는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김교헌, 박찬익,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신규식 등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일제의 포학함과 인류평화에 미치는 위험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주독립의 민주국가 건설을 대전제로 삼았다. 또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한다면서 평화의 단계를 평등-평화독립-대동평화-동양평화의 연계구도로 설명했다. ‘평등’은 전제와 강권의 시대가 가고 서민들을 살리는 새로운 시대의 ‘공의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하늘의 뜻(天意)에 따르는 것이며, 약한 나라, 힘없는 민족을 구제하는 대지의 복음이라고도 하였다. 즉 평등은 강한 자에게만 전유되었던 자유를 약한 자에게도 부여하는 것으로서, 평등한 평화는 강자중심이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 중심, 약자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평화독립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지구에 사는 자의 권리로서 세계의 개조와 대동단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독립’은 민족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 행사이며, 비문명적인 보복수단에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진정성에 의해 타자를 감화시키고 변화시키는 것,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평화독립은 강자들의 정치적 협상을 통한 세력균형의 평화가 아닌 ‘정의’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가치로 표상하였다. 그는 서양이 주도하는 강대국들의 밀맹(密盟)과 전쟁을 반대하고 전세계 민족의 평등해지고 천하가 균등해지는 세상을 지향하였다. 이를 통해 국제적 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하는 한민족 부활과 대동평화의 주체로서 한민족을 부각시켰다.

조소앙은 대한독립선언서에서 “일본주의 동양평화는 동양의 적이며, 일본의 조선합방은 사기 강요, 불법무도, 무력폭행을 동원하여 국제법규를 어긴 것이며, 합방결과로 경제, 군사, 종족, 종교, 교육을 압박,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인류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천의, 인도, 정의, 법리에 따라 일본의 조선합방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후 1919년 3월 조선 각지와 중국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3.1 운동이 확산되자, 그는 이에 고무되어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때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의 기초위원으로 실무 작업을 담당하였고,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을 겸임하였다.

1919년 6월 상하이에서 출발한 그는 1921년 5월까지 유럽소련 여러 지역을 순방했다. 그는 유럽 방문 동안 한국사회당의 대표 자격으로 8월 1일부터 9일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승인과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고, 36개국에서 온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한국독립의 승인안’을 통과했다. 이후 영국 노동당 인사를 만나 맥도날드 등과 회합하여 영국 하원에 한국문제에 관한 4개조의 토의 안건을 제출케 하였고, 덴마크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지를 방문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당 명의의 기관지 <적자보(赤子報)>를 간행했다. 또한 파리에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만나 ‘시간의 머리와 공간의 꼬리’에 대한 문답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후 1921년 3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대회를 참관하였으며, 이르쿠츠크와 치타 등을 거쳐 만주를 지나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그는 소련에서 발발한 볼셰비키 혁명이 혼란상이 지극히 심하다는 걸 인식하고, 공산주의에 폐단이 많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했다.

1922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판한 <독립신문>에 실린 논설 ‘독립당과 공산장의 앞날’에서, 조소앙은 “계급통치와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공산당의 특징”이라며 “식민지하에서는 공산당도 제일차 목적이 독립전쟁이고, 그런 연후에 2차 목적이 공산전쟁이므로, 당장에는 ‘공조협진(共助協進)’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독립군과 공산당끼리 싸우지 말고 이론과 전략을 분명히 기초하여 해내외 동지를 규합하여 공적인 일제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2년 1월 중국국민당 간부가 된 동지 장지(張繼)의 초청을 받아 상하이에 돌아와서, 장지의 소개로 쑨원과 면담하였다. 이어 장지와 황찌에민 등 중국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한살림(韓薩任)>이라는 아나키즘 성향의 비밀결사를 정식 조직했다. 한살림은 일명 ‘대동당(大同黨)’이라 칭하며,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동지들과 함께 국제적 연대를 맺어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인류 대동사회를 건설하는 걸 지향했다.

한살림 조직이 정확히 언제 창립되었으며 주도멤버들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벌였으며 언제 코민테른에 가입 신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코민테른에서 1920년 11월 28일자로 한살림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했다는 문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조소앙이 소련 모스크바의 공산당대회 참관 이전에 이미 조직하여 가입 신청을 했음이 확실해 보인다. 1923년 1월 서울에 잠입해 일본 경찰과 대결하다 자결한 김상옥이 바로 한살림의 멤버였다. 조소앙은 1925년 <김상옥전>을 간행하면서, 김상옥이 1922년 5월 한살림당에 스스로 들어왔고, 자신이 김상옥을 황찌에민에게 소개하고 그 자리에서 “인류 평등·세계 대동을 함께 실천하자”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조소앙이 ‘한사임(韓薩任)’이라는 필명으로 저술하고 발행한 <한사임요령>에는 한살림의 강령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우선 제1장 ‘본의’에서, “한살림은 민주독립, 곧 광복만한(光復卍韓)을 제1단계로 하고, 빈주공생(貧主公生), 곧 계급혁명을 제2단계로 하며, 무치(無治), 곧 부원(府院)을 이탈함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에 제2장 ‘강목’에서는 3단계의 경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제1단계에서는 독립전쟁이 필요하며 이에 30년, 제2단계에서는 계급전쟁이 필요하고 이에 50년이 걸린다. 나아가 제3단계의 세계한살림을 대비하여 우선 전 아시아에서 사산(私産)을 제거하여 공유(公有)로 돌아가게 하며 방국(邦國)을 일가(一家)로 바꾸고 아시아한살임(亞細亞韓薩任)을 조직하여 천하 진전시킨다. 천하에서 한살림(韓薩任)이 완성되면 즉 전쟁을 없앨 수가 있고 부원(府院)을 없앨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치(無治)로 돌아간다. 이를 극락세계라 한다.

그러면서 7가지 실천 강목을 제시했다.

첫째 불소찬(不素餐, 남녀빈천 구애 없이 능력을 발휘함)


둘째 무사권(無私權, 상속과 겸병, 사유특권을 없앰)

셋째 이성동권(異姓同權, 남녀가 권리·의무를 균등히 함)

넷째 자강대(自强隊, 노동자의 무장 훈련)

다섯째 비전쟁(非戰爭, 독립전과 자위전 이외의 전쟁을 금할 것)

여섯째 민족연맹(民族聯盟, 각 민족과의 연맹과 대동화합)

일곱째 세계한살림(世界韓薩任)

그는 세계한살림에서는 “민족과 민족이 평등하게 되고 국가와 국가가 균등하게 된 후에 평화를 달성시킬 수 있다. 평화스럽고 안정되면 저절로 세계한살림의 무치(無治)가 완성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이상사회로 여겼다. 즉 아나키즘과 도교에서 지향한 권력 없는 ‘대동사회’의 건설을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이다. 한살림당의 조직은 크게 당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의 이원체제로 구상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문사부와 무사부로 나뉘는데, 무사부는 군사와 전략 문제뿐 아니라 전쟁·암살·파괴·습격·약탈·정탐·파업 등 투쟁방법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서는 무력투쟁도 감수하는 혁명단체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소앙은 1922년 6월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의정원 의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외무총장에 취임하여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원조와 한중 공동전선의 모색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 독립운동 진영은 이념과 파벌 대립으로 분열되었고, 임시정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923년 1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의 최고 기관으로 삼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최고기관을 설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뉘었다. 이때 조소앙은 개조파와 창조파 모두 옳지 않다며, 임시정부를 그대로 존속하며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 중심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뒤, 임시정부 내에선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론이 대두되었다. 이승만은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돼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상하이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인사들과 갈등을 겪다가 미국 워싱턴 DC로 돌아간 뒤 상하이로 오질 않고 자신을 추종하는 인사들을 중용하여 임시정부를 ‘원격 조종’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인사들은 “이승만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1925년 3월 탄핵안이 통과되면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을 따랐던 조소앙은 1925년 5월 16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쿠데타를 종용했다.

전날 말씀드린 대로 선포문을 발간하십시오. 전후 내막을 폭로해 내외 동지의 굴기를 고취하며 일면으로 무사(武士) 기십 인을 지휘하여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인장(印章)을 압수하고 즉각 내각을 발표하여 정령을 반포하면 현 정부는 와해될 겁니다.

그러면서 “쿠데타가 비현실적이라면 하와이에서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새 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 일은 2009년 2월 이승만이 소장했던 서한 666통이 세간에 공개되면서 드러났다.[2]

1927년 조선에서 신간회가 성립되자 이에 호응하여 11월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고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촉성회는 민족세력 통합운동을 추구하였으나,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한국유일독립당 수립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세력은 독자적인 독립운동 정당을 수립하기로 하였고, 조소앙은 1930년 1월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을 포함한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이때 그가 직접 당의, 당강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오랫동안 기획한 사상이 반영되었으니, 바로 삼균주의(三均主義)다.

삼균주의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균등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균등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 보통선거제 국유제 국비의무교육제의 실시를 들고 있다 민족과 민족의 균등은 민족자결주의를 자민족과 타민족에게 적용함으로써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이 피압박 피통치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국가와 국가와의 균등은 식민정책과 자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국가가 서로 간섭하거나 침탈하지 않는 국제생활에서의 평등한 지위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해일가, 세계일원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한다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체계를 가진 삼균주의는 식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존재하는 국제사회에서 내부적으로는 한민족의 동질적 발전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한민족이 인류의 공헌체로 존재할 가치를 이론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치ᆞ경제ᆞ교육의 균등은 민족내의 계급을 극복하여 민족의 동질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으로서 광복 후 민족국가건설에 대한 기본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성격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삼균주의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국민생활의 균등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즉, 조소앙에게 있어서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사회주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평등의 실현을 위한 정책으로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 후에 건국될 국가의 위상을 한민족 전체의 소유로 규정하였고,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설정했다. 이러한 민주공화국의 기초는 정치적 균등으로 보통선거를 통한 국민의 참정권 평등과 국민의 기본권리 보장 및 지방자치와 의회 등의 민주주의 제도를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가 사상의 핵심을 평등으로 한 것은, 모든 분쟁의 원인이 불평등에 있으며, 불평등이 작용하는 영역이 개인, 민족, 국가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그 과정으로 제시했다.

조소앙은 개인관계의 균생 민족관계의 자결 국제관계의 완전한 평등적 주권행사는 아직까지도 인류사회의 필수과정으로 잔존하기 때문에, 이것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투철한 태도와 결정적 정책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복국단계에서는 정치ᆞ경제ᆞ교육의 대 핵심문제를 일보씩 균권(均權)ᆞㆍ균부(均富)ㆍᆞ균지(均智)의 방향으로 추진하며, 계획함에 용감한 혁명적 수단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건국시기에는 정치ᆞ경제ᆞ교육의 대 문제를 완전히 실시하여야 한다고 봤다. 그러므로 정치ᆞ경제ᆞ교육의 균등제도는 복국ᆞ건국ᆞ치국 단계의 공통된 필수 과정이자 중심공작이며 기초적, 본질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조소앙에게 있어서 정치문제는 항상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었으며, 경제를 통하여 교육문제에 연결되고, 개인의 균생권 문제와 민족의 자결문제와 국제간의 평등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경제문제가 모든 것의 중심이자 원천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산관계 위에 건립된 경제제도 위에 전부가 축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하여 균등하게 생산ᆞ분배ᆞ소비 등 권리를 부여하며, 민족을 중심점으로 하여 고도의 과학방법으로 생산을 증가하며, 국민전체의 총부력(總富力) 을 증가하는 동시에 응분의 소비를 균등하게 하고, 국제적으로 자원의 호용, 기술의 합작, 자본의 수출입 등 교호관계를 전제로 하여 국제전체에 상응한 조화 및 협조를 촉진하여야 한다.

그는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교육의 성질로 보아 개인의 완인육성 문제로 개인에 연락되고, 민족의 건전한 자격품성 및 재능을 양성할 필요로 민족에 치중할 필요가 있고, 지식은 국경이 없으니 국제적 성질이 농후하며, 과학의 수입 및 수출은 일종의 국제 문화생활 중 불가분의 임무인고로, 국제방면에 진정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요언(要言)하면 지(智)의 정도 제고가 지(智)의 횡적 보급과 균학주의 또는 지(智) 의 내용으로 하여금 신인ᆞ신민족ᆞ신세계 창조에 적합하도록 매진케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삼균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내적으로는 국민개인의 정권참여 기회의 균등화, 경제적 조건의 균등화, 교육기회의 균등화를 달성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을 철저히 함으로써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더 나아가서 국제간의 침략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세계평화를 달성하려는 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시준 교수는 논문 <조소앙의 삼균주의>(1993년)에서 삼균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삼균주의는 일제에게 국토와 주권을 상실했던 시기에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민족 전체의 행복이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나아가 인류평화가 실현되는 최고단계로서 세계일가를 지향했던 한국 근대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이러한 삼균주의는 서양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쑨원의 삼민주의를 종합 체계화한 것이라는 평이 대세다. 하지만 정영훈 교수는 <조소앙의 삼균주의 정치이론과 단군민족주의>(2007년)에서 삼균주의가 ‘단군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균권-균부-균지의 삼균론은 대종교의 ‘삼일사상(三一思想)’으로부터 시사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소앙이 단군을 언제나 ‘국조’로 칭하고, 한민족을 ‘배달겨레’로 지칭했으며, 중국 망명 시기에 개천절을 기리는 논설을 여러 건 발표하는 등 단군 민족주의자였다며, 삼균주의는 이러한 조소앙의 신념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삼균주의는 1931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조소앙은 삼균주의 이론체계를 정립한 임정의 대외선언을 기초, 작성하여 재중독립운동자 전원에게 배포했으며, 그해 5월에는 난징에서 개최된 중국 국민당정부의 국민회의에 제출했다. 또한 1934년 1월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진광>을 발간하여 <민족문제연구>와 <각국혁명운동사요> 등을 발표했다. 또한 1934년 11월 국무위원회에서 삼균제도를 국시로 채택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하고, 이를 결의에 의해서 통과하게 하였다.

1932년 윤봉길홍커우 공원 의거 후 일본군이 임시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려 하자, 조소앙은 동지들과 함께 항저우, 난징으로 피신했다. 이후 한국독립당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그는 1935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하자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정강, 정책 기초위원을 맡아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려 하였으나, 3개월 후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였고, 한국독립당에 돌아왔다. 그는 이 시기에 과거에 신봉했던 아나키즘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각국혁명운동사요>에서 서구 아나키스트들의 “모든 억압적 공구를 박멸하고, 어떠한 정부나 국가나 기타 기관의 통치적 시설을 세우지 말자”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현대 인류로서는 통치기관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으나, 절대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일 민족의 위에 서 있는, 또한 일 계급 위에 있는 통치기관은 전복할 것이나 그네들의 수중에서 창조된 새로운 통치기관은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계급 대 타계급, 일민족대 타 민족의 관계도 이와 같다. 이유를 말하자면, 통치기관의 재건설 없이는 구 통치계급의 권토중래를 방치할 수 없다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신세력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이 혁명의 모순성이다.

그는 이상의 실현과 자율국가 수호를 위한 방법으로서 새로운 통치기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한 후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할 민족혁명 과정에서 자율적 국가권력의 건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설명했다.

강도의 장품(贓品)을 회수하기 위하여 우리의 무장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는 동시에 적의 점령한 일체를 회수하되, 우리의 무장은 적의 재습(再襲)을 방지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결단코 자수(自手)로써 무장해제를 감수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로서 다시 강도가 되어 인류에게 범행하자는 본의가 아니고 오직 회수한 물건을 영구하고도 완전히 보장하자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라는 무장에서 정부라는 군계(軍械)를 방수(放手)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이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난징까지 들이닥치자, 그는 임시정부와 함께 각지를 떠돌다 1940년경 충칭에 도착했다. 그해 5월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을 때, 그는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창당 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내세웠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포고문을 기초하고 광복군 창립 전례식에서 공표했다. 그해 10월에는 제4차 개헌을 통해 수립된 김구 주석 체제에서 외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표하였고, 1942년 1월 선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임이 된 뒤 내외에 대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설립하여 중국 정치인들과 상호교류하였는데, 그는 이 협회에서 김규식과 함께 부회장직을 수행했다.

1943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1945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서 ‘대일선전포고문(1941. 12. 9)’, ‘대독선전포고(1945. 3. 1)’ 를 포함한 많은 대외 문서를 작성, 발표했다. 1945년 3월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 일제에 대한 엄정한 처리 등을 요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참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한편 카이로 회담에 참가할 예정이던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을 언급하는 조항을 넣어달라고 청했고,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여 회담 석상에서 한국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결과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었다.

광복 이후[편집 | 원본 편집]

8.15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조소앙은 임시정부 대변인 겸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따라 건국운동을 계획하였으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합의가 발표되자, 그는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었을 때 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12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고 조소앙에게 관선의원이 되라는 제안을 하였으나, 그는 거부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9월 미소공동회의가 끝내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렬되자,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이관했다. 조소앙은 이를 통일독립국가 건설의 호기로 판단하여 남북협상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말 한국독립당 내의 진보파와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중도파와 협력하여 각정당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유엔과의 협의를 통해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그러나 김구가 11월 19일 당무위원회에서 각정당협의회의 활동을 보류시키도록 지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김구는 조소앙의 행위가 한국독립당의 고립화와 당내 좌경화를 심화시킨다고 판단했기에 이러한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경한이 이끄는 청년 20여명이 김구의 정당협의회 참여 보류 지시에 반발하는 정형택, 성낙훈, 김경태, 조각산에게 테러를 가하고, 한독당은 이들을 제명 처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김구계는 조소앙계 인물들에게 “정당협의회를 추진하는 것은 조소앙 선생의 지도하에 당을 분열하려는 것”이라는 위증을 강요하였으며 조소앙이 근로인민당의 정백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던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 대표 겸 동아일보 사장 장덕수(張德秀)가 박광옥, 배희범에게 암살당했다. 경찰은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김석황이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수배령을 내렸다. 이때 조소앙 역시 사건에 연루되어 12월 20일 미군청 경찰에 연행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무혐의 처분되었고, 자택에 은거했다. 그러다 1948년 1월 국민읭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대회에서 의장으로 피선되었고, 1948년 2월 유엔에 의해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발하여 김구, 김규식과 함께 제헌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4월에는 남북협상안 7개항목을 발표하고 남북에 의한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하여 김구·김규식·조윤제·조시원·조일문·하상령·임영대·조만제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김일성 등 북한 정권에게 이용당하기만 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월에 돌아와 여현성명(礪峴聲明)을 발표하여 남북회담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정권을 비판하였다.

북방은 소련 코민포름 지령 하에 강대한 권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한 데 대하여 우리들은 (중략)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실패에 돌아간 것이다.

남한에 돌아온 뒤 삼균주의 학생동맹을 결성하여 청년단체의 육성, 발전을 지향하였다. 또한 김구, 김규식과 결별하고 한국독립당을 탈퇴한 뒤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으며, 1948년 7월 21일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선 때 총리 예비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피살되자 김구를 추모하는 논평을 발표하고, 김구의 국민장을 오세창, 김규식과 함께 주관하였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고 서울 성북구에 입후보해 민국당 조병옥 후보와 맞붙었다. 5월 30일 선거 결과 전국 최고득표(34,035표)로 조병옥을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1달 뒤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는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북한군에게 억류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납북되었고, 전쟁 기간 유엔 공군의 폭격 위협에 시달렸다. 전후 박헌영 숙청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1955년 납북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을 추진하였으나 북한 정권이 불허하여 무산되었다. 또 김일성에게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지만, 김일성이 북한 중심의 통일방안을 고집해 무산되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나, 김일성의 독재 체제에 반대하여 단식 투쟁을 하다 1958년 9월 10일 평양 남산병원에서 병사했다.[3] 북한 정무원 부부장을 지내다 월남한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조소앙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를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조소앙의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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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