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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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儁. 이명은 이성재(李性在)·이여천(李汝天)·이선재(李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9년 12월 18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중산사 용전리 발열동(현재 함경남도 북청군 용전리 발열동)에서 전주 이씨 이병관(李秉瓘)과 청주 이씨 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형인 완풍군 이원계의 18대손이지만, 이준의 부친 대까지 7대가 전혀 벼슬에 오르지 못하여 경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5살 때인 1863년 부모가 닷새 간격으로 사망해서 조부 이명섭(李命燮)과 숙부 이병하(李秉夏)에게 양육되었다. 12살 때 신안 주씨 주만복(朱萬福)의 딸과 결혼하였고[1], 일찍부터 전통 한학을 이수하여 1887년 1월 1일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기 전 세도가 김병시(金炳始)의 문객으로 한양에 10여 년간 체류하였다.

1887년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과거를 보지 않았던 이준은 1894년 8월 7일 순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순릉은 함경도 함흥 근처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조모릉이었다. 그러나 순릉참봉직을 7개월만인 1895년 3월 10일에 사직하고 1895년 4월 16일 법관양성소 제1회로 입학하여 그해 11월 10일에 졸업했다. 이후 1896년 2월 3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었다. 이 임용은 상당히 특이한 것이었다.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중 수석 함태영(咸台永)은 아직 임관되지 않았는데, 14등으로 졸업한 이준이 먼저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장지연은 <위암문고>에서 김학우와 장박이 이 인사에 관여했다고 언급했다. 김학우는 1894년 10월 흥선대원군파에 의해 암살되었으니 이준을 추천할 수 없고, 법부의 인사를 장악하고 있던 법부대신 장박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박은 함경도 종성 출신이었는데, 이 점이 이준을 검사시보로 조기발탁한 것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된 지 1주일 뒤인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일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준은 3월 5일자로 면관되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는 이준이 10여 일동안 관청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면관했다고 하였고, 장지연은 이준이 검사시보로 임명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개혁운동이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했다. 또,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이준이 법부대신 장박과 함께 화를 피하기 위해 궁궐을 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4년 뒤에 귀국하였다고 서술했다. 그렇게 이준이 면직되자, 그 자리에 수석졸업생인 함태영이 임명되었다.

일본에서의 이준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었다. 일본 정부의 정보기록인 <요시찰한국인행적>에 따르면, 그는 1897년 10월경 도쿄에 거주하였고, 질병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다고 한다.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 등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정보기록에 따르면 1898년 9월 박영효 등이 귀국을 협의할 때도 동참했다고 한다. 이준은 동경전문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고 했는데, 법관양성소에서 일본인 교수에게 법학을 배운 경험이 있었고, 일본 정보기록에서도 그가 일본어에 능숙했다고 하였으므로 일본학교에서 법학을 익히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준이 언제 귀국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다. 1898년 9월 박영효 등이 귀국을 협의할 때 그 역시 참여했는데, 박영효는 귀국을 포기했지만 이준은 그 무렵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 장지연의 <위암문고>와 송상도의 <기려수필>에는 그가 독립협회가 적극 관여했다고 언급하였고, 이계형의 <고종의 마지막 특사 이준>에는 일찍이 문객으로서 모셨던 김병시가 1898년 즈음에 사망한 뒤 이준이 귀국하였다고 기술되었다. 이준이 독립협회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외교문서에는 고종 황제가 헤이크 특사 이준을 과거 독립협회 회원이었다고 언급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1904년 2월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의 보고서에는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는 한국인 명단에 이선재(李璿在)가 있다고 기술되었는데, 이선재는 이준의 이명이다.[2]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준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귀국한 것이 된다. 일설에는 이준이 민영환, 이상재 등과 함께 개혁당 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체포된 인물 중 이준은 없었다.

이준의 본격적인 행적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드러난다. 그는 1904년 3월 20일경 동지의연소(적십자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군 부상병에게 헌혈하기 위해 피를 모으고자 하다가 3월 23일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한 평리원의 보고서에는 이준의 본거가 북청으로 되어 있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를 역임한 '이선재'라는 사실이 기술되었다. 그의 죄목은 '외국군에 충애를 바쳤고 인심을 교란했다'는 것이었다. 평리원은 80도를 선고하였지만, 이준은 법적 이유를 들어 "검사가 공법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양민을 핍박하였다"며 불복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동지의연소를 설치한 이유에 대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준 은인으로, 재정과 군사를 내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때에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일본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설치하였다"고 밝혔다.[3]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백인종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이른바 '아시아연대론'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았던 걸 보면, 이준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특별하지 않았다.

이준은 체포 후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이승만의 노력으로 도서실이 설치되고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준은 3월 27일 감옥도서실에서 여러 책을 빌려 읽고 반납하였는데, 주로 서양근대학문에 관련된 도서를 탐독했다. 또한 도서실에는 기독교 서적이 많이 소장되었는데, 그 서적을 읽은 국사범 상당수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1904년 중 석방된 국사범들이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함께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은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지 않앗는지 기독교 관련 서적을 대출하지 않았다. 그는 1904년 6월경에 출감하였으며, 출감 직후 기독교에 입교하지 않았다. <이준선생전>에는 이준이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참여했다가 협동회로 개편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다는 기술이 있지만, 당시 자료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1904년 12월, 이준은 공진회에 참여하여 회장으로 활동했다. 공진회는 친일단체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보부상을 배경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지도부는 독립협회 관련자들이 맡았고, 회원의 주류는 보부상이었다. 이준이 공진회 회장 나유석과 언제부터 관련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 반대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뒤 한성감옥에 갇힌 나유석과 감옥에서 만나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준은 12월 10일에 열린 공진회 임원개선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2월 6일 연설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8일자 잡호 '공진회연셜'에 실렸다. 이준은 이 연설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만주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 동포도 빨리 분발하여 이용후생을 발달해 문명대열에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진회는 외형적으로는 일진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강령을 내세웠지만, 법치주의의 실현을 강조했던 점은 주목된다. 이들은 국민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국민의 생명, 재산권에 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특히 불법적인 재산권 피해에 따른 대국민 법률구조사업을 실시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점은 <제국신문> 1904년 12월 20일자 잡보 '공진회선언'에서 드러난다. 이준은 당대에 보기 드물게 서양 근대법학을 이해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진회가 법치주의에 관해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공진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진회의 해산이었다. 그들은 1904년 12월 24일 여러 고위관리를 강제로 붙들어 평리원에 일진회를 벌하라고 요구했다. 이 일로 12월 25일 이준, 나유석, 윤효정이 체포되자, 공진회는 석방을 위한 시위를 전개했다.일진회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정부는 일진회를 탄압하며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서울의 치안이 동요하고 있다며 일진회를 보호하며 군사경찰을 실시해 서울의 치안을 장악했다.

평리원은 12월 28일 이준과 윤효정에게 종신징역을, 나유석은 유배형에 처하기로 선고하였다. 1905년 1월 법부대신은 이들을 감 1,2등하기를 상주하였으나, 고종 황제는 감 3등하여 유배에 처할 것을 명하여, 나유석은 유배 5년, 이준과 윤효정은 유배 3년으로 결정되었다. 공진회는 이 결정에 반발하여 정부에 여러 차례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이들은 1월 19일 유배지로 출발했다. 그러나 2월 12일 황제의 조칙으로 특사방면되어, 사실상 유배는 1개월도 되지 않았다. 고종이 공진회 인사들을 봐준 건, 공진회의 주류인 보부상이 1898년 황국협회에서 활동할 때부터 황실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윤효정은 을미사변을 주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일본에 망명했던 우범선을 암살하는 데 관여한 적이 있어서 고종의 신임을 받기 충분했다. 이준도 공진회에서 활동할 때부터 황실과 일정한 연관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준은 1905년 5월 헌정연구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헌정연구회는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위한 헌정 연구를 내세웠지만, 그 목적은 일진회의 타도엿다. 그들은 국민에게 헌정에 관련된 문제들을 계몽한다는 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전제군주국인 대한제국의 체제를 보전하기 위해 공화제의 위험을 제시하고, 입헌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준이 이 단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인하기 어려우나, 중도에 사퇴한 걸 보면 마찰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화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준은 전덕기가 주도하는 상동교회 또는 상동청년회에 참가하여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달리 유자후의 <이준선생전>에 따르면, 이준은 을사조약 체결 전에 민영환과 협의하여 일본 도쿄에 가 박영효 등을 만나고, 11월 초 중국 상하이로 가 이용익, 호머 헐버트 등과 한미공수동맹을 위해 노력하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일보> 1937년 1월 4일자 기사에 '그들의 청년학도시대'를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도쿄에서 이준을 을사년(1905년)에 만났으며, 상야정양헌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에 유학생 40명과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고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05~1906년을 전후하여 이준과 손병희가 도쿄에서 만난 것만은 확실하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천도교로 개편하며 교당을 건축하겠다는 광고를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에 게재하고, 1906년 1월 말 귀국했다. 이때 이준이 그를 찾아갔고, 이후 국사범으로 낙인찍혔던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황실로부터 지원금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천도교와 황실 사이에 제휴가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준은 아마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동학 세력과의 제휴를 시도하여 성공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4월 귀국한 이준은 국민교육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국민교육회는 1904년 8월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된 전직 관리들이 주도하여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된 단체였다. 이준 역시 이 시기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공진회 사건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1905년 2월 이후에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성감옥에서 기독교 서적엔 눈길도 주지 않았던 그가 어떤 계기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1907년 3월 연동교회의 사찰을 맡았던 것을 볼 때, 기독교 입교 후에는 교회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전덕기, 정순만, 최재학, 이승만, 박용만,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종종 출석하여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교육계몽운동에도 기여했다. 부인 이일정이 광동학교의 교감으로 활동해서인지, 여성교육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여자교육회의 찬성원을 맡았고, 종교의숙, 장훈학교 같은 사립학교의 찬성회 등에 관여했으며, 휘문의숙 개교식에도 참가하여 교육이 국가동량의 기초가 된다는 연설도 하였다. 일본유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의 발기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1906년 10월 함경도 인사들이 주도한 한북흥학회의 발기에 적극 참여하고 1907년 3월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6년 6월 18일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었고, 그해 7월 31일 특별법원 검사를 겸임했다. 그는 매일 평리원에 나아가 감옥에 들려 죄수들을 효유하고 병자들을 치료케 하며, 맡은 사건을 빨리 처리했다고 한다.[4]

1907년 2월 황태자비 관례에 따른 대사령이 내려졋다. 이때 은사 집행과정에서 법부의 고관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준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기산도 등을 사면하려고 은사안을 만들었는데, 형사국장이 이들을 제외하고 무고죄를 저지른 자들을 대신 은사안에 넣은 걸로 알려졌다.[5] 하지만 당시 신문기사에는 이준이 기산도를 석방하려 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 대신, 기결수 가운데 모살 미수사건 김일제 등 10인과 미결수 가운데 민요사건 관련자 등을 은사안에 포함시켰는데 형사국장이 이들을 빼고 무고죄인 이유인 등을 넣었다는 내용이 기술되었다.[6] 이중 모살미수사건 관련자 김일제 등 10명이 바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한 이들로, 을사조약 체결에 기여한 군부대신 이근택을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친 인사들이었다. 이준은 은사안의 불공평을 시정해달라는 청원을 법부에 올렸지만, 문서과장이 이를 거부하자 법부대신 이하영 등에게 항의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자 이준은 계속 이를 문제화했고, 결국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소되어 수감되었다가 하루만에 석방되었다.

이준은 즉각 평리원 수반검사, 형사국장, 문서과장 등의 처벌을 청원하였고, 형사국장과 문서과장을 평리원에 고소했다. 평리원은 이준에게 태형 100도를 선고했는데, "상관을 고소하고 문서를 훼손한 죄"가 적용되었다. 고종 황제는 형량을 태형 70도로 감형했다. 태형 70도는 이준이 검사직을 유지할 수 있는 형량이었지만, 법부는 1907년 3월 14일 이준을 면관시켰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법부대신 이하영이 이준의 면관 주본을 참정대신의 연서도 받지 않고 상주하자 황태자가 보류시켰는데, 면관이 공포되는 바람에 황제가 진노하여 그 내용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준은 3월 16일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이 일로 여론이 들끓었고, 신문과 사회 각 단체는 이준을 지지하며 법률의 공정한 집행을 요구했다. 1907년 2월 25일 연합연설회가 개최되어, 법관과 법률문제에 대하여 10개의 주제로 연설이 행해졌다. 연일 신문마다 이 사건의 진척이 보도되었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사임압력을 받았으며, 이준은 강직한 인물로 각인되고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천도교가 운영하는 <만세보> 1907년 3월 20일자 논설에서는 "강직한 명사가 면관한 인재"라고 표현하였다. 어쨌든 관직을 그만둔 이준은 다시 계몽운동에 투신했다. 3월 말 한북흥학회의 회장을 맡아 재경 함경도 인사와 함경도의 계몽을 주도하였고, 이어 4월 초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을 맡아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4월 20일 대한자강회에서 "생존의 경쟁"이라는 연설을 하였다.


이준은 이무렵 양기탁, 이회영, 전덕기 등으로부터 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동교회 인사들과 논의한 끝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이회영은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 밀파 계획을 전달했다. 고종은 위임장에 4월 20일자로 수결(사인)하고 옥새만 찍어서 보냈다. 이준은 황명을 받들어 4월 22일 서울을 떠나 4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때 황국협회 시절부터 황실과 관련되었으며 공진회에서 이준과 함께 했던 나유석도 동행했다. 이준은 5월 중에 이상설을 만났고,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했다.

6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준과 이상설은 전 주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들은 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시내의 융 호텔에 숙소를 정한 뒤, 호텔에 태극기를 계양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헤이그 회의에서 폭로하고, 국권회복의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호버 헐버트가 이들을 지원하러 헤이그에 왔고, 미국에서 윤병구도 도착했다. 헤이그특사들은 먼저 만국평화회의에 공식적인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토프는 네덜란드에 책임을 미루었고, 후온데스는 이미 각국정부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여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다. 특사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결국 특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처지를 알리는 문서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비공식적인 경로로 보내고, <평화회의보>에 그 글을 발표했다.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한 특사들은 거기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위종은 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이른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롤 명명되었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는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체택했으며, 현지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었고,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돌연 사망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7월 18일자로 '의사(義士)가 자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씨가 현금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작일에 발한 동경 연보를 거한즉, 이씨가 충직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부려서 만국을 격동케 하였다더라.

이 기사는 이준이 만국평화회의 석상에서 할복자살하였다는 설의 출발점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 보도를 인용하여 이준이 회의장에서 할복하여 피를 부렸다고 기술하였고, 이러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화자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진서신문(鎭西新聞)은 이준이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사망하였다고 보도했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간에 결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했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리고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와 가진 인터뷰에도 이준이 할복했다는 언급은 없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이준의 할복 자살 소식은 조선 전역에 번졌다. 1910년대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또 민족주의 진영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는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렸다'고 서술했다.[7] 하지만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이준이 회의장에서 자결하지는 않았지만, 1주일간 단식하다가 자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8]

이준의 유해는 Niewe Eykenduynen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외면당했다. 한편 일본은 이 사건을 명분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 병합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일본의 압력에 따라 궐석재판에서 수괴로 지정된 이상설에게 사형, 종범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준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1963년 9월 30일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여 10월 4일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서울 이준 묘소'에 안장했다.[1] 기존에 유해가 있던 장소엔 흉상과 함께 ‘일성이준열사의 묘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건립되었으며, 이준의 활동과 순국에 관한 안내문도 함께 부착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최기영, <한말 이준의 정치 계몽활동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7.[2]

각주

  1. 35세인 1893년 이일정(李一貞)과 결혼하였는데, 신안 주씨가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이일정과 재혼했는지 첩으로 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2. 보고서에는 이선재가 특별히 주의를 요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3. 황성신문 1904년 3월 23일자 기사.
  4.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0일자 기사
  5. 황현, '매천야록'과 유자후, '이준선생전'에 해당 기록이 있다.
  6.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12일자 기사.
  7. 이준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 한겨레
  8. “이준 열사, 단식 상태에서 자결했을 것” -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