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완

박경완
포도대장.jpg
인물 정보
출생 1972년 07월 11일 (51세)
대한민국 전주시
프로선수 경력
종목 야구
포지션 포수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1~1997)
현대 유니콘스 (1998~2002)
SK 와이번스 (2003~2013)
SK 와이번스 영구결번
26[1]
한국시리즈 우승
1998
한국시리즈 우승
2000
한국시리즈 우승
2007
한국시리즈 우승
2008
한국시리즈 우승
2010


소개[편집 | 원본 편집]

포도대장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포수

쌍방울 레이더스,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던 선수였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려고 했으나 김원형의 도움으로 신고선수에 입단했다.

이때는 즉시전력감으로 포수로써는 몇번은 쓸수있는 능력정도였다.

신고선수 탓에 초반에는 포수의 사인도 무시당할 정도로 매우 힘든 시절이였다.

젊은 나이에 구단을 말리고 방위병에 입단할때 조범현 배터리코치가 부임해서 엄청나게 훈련한 결과가 대성공했다.[2]

주로 1994년부터 주전을 꿰차더니 1996년은 쌍방울의 주전포수로 발돋움을 했다.

이때까지 사인을 무시했을때 조범현이 대놓고 투수한테 질책을 했을 정도로 아낄 정도였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98년에 2-1 트레이드로 현대 유니콘스에 이적했다.[3]

이때에는 세자릿수 안타와 타율은 낮지만 중요한 상황에서의 타점이라던가 정민태와의 볼배합으로 주로 커리어하이를 이루었다.

2000년도에는 40홈런과 한경기 4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MVP를 수상할때 내년(2001년)에는 20-20클럽을 한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립서비스라고 다들 생각했지만.

2001년에는 24홈런과 21도루를 기록해 20-20클럽에 가입했다.[4]

그러나 MVP까지 노려보려 했지만 골든글러브는 홍성흔이 강탈해갔다.[5]

2002년에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못했지만 19홈런을 기록해서 FA로써는 꽤 노려볼만한 포수가 됐는데.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02년 시즌후 FA에서 3년 19억으로 SK으로 이적한다.

이때 감독이 바로 쌍방울 시절 엄청나게 훈련이 시킨 조범현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볼배합으로 SK왕조의 틀이 된 선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SK의 포수진은 노쇠화와 수비가 안 좋거나 또 공격이 너무 안 좋은 탓도 있는데 박경완이 영입되고 나서는 주로 백업 신세와 트레이드, 은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2004년에는 커리어 2번째로 홈런왕을 차지했는데 골든글러브는 또 놓쳤다. 범인은 홍성흔이다.

워낙 볼배합이 뛰어난지 김성근 감독도 웬만한 배합은 박경완에게 맡길 정도로 믿음이 간 선수였기 때문이다.

2009년[편집 | 원본 편집]

2009년 시즌 전에는 WBC에 출전했는데 이때 부상으로 타격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김인식 감독도 수비로 뽑아갔을 정도였는데 수비는 역시 최강이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기에서 주루중에 아킬레스건 부상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30살 중후반 나이에 수술을 하고 나면 주전을 장담 못하고 은퇴를 해야할 상황이었는데…

2010년[편집 | 원본 편집]

큰 부상으로 복귀 여부는 모르는 상황에서 4월달에 다시 복귀했고 박명환을 상대로 홈런으로 포수로써 300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때 아킬레스건의 부상이 아직 회복이 다 된 상태가 아니어서 펜스 맞는 1루타가 자주 나올 정도였는데 이 해 사구가 27개로 단독 1위로서 극복하였다.

9월달에는 포수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는 전경기 출장이 되고 교체없이 4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조범현 감독에 의해서 수술을 미루고 출장해 공수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2011년[편집 | 원본 편집]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여파인지 잠시 주춤했다.

잠시 1군에 복귀했지만 주루중에 발목 부상으로 2군에 치료를 하고 끝내 1군에 콜업되지 못했다.

2012년[편집 | 원본 편집]

원래 박경완-정상호 콤비로 하려 했으나 박경완은 2군에서 극심한 부진과 부상과 정상호도 역시 부상으로 FA로 영입된 조인성이 주전을 봤다.

부상이 회복하고 1군에 올라왔지만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2군에 내려갔다. 그러나 2군 역시 2할도 되지 않는 타율을 기록하면서 올해 끝나고 은퇴를 예상했다.

이때 시즌이 끝나고는 주전 포수인 조인성과 백업 정상호와 군복무를 마친 이재원까지 합류하면서 방출이나 은퇴를 예상했다.

그러나 시즌을 연장한다고 밝혔다.

2013년[편집 | 원본 편집]

시범경기에서는 리드한 투수가 죄다 홈런이나 실점해 볼배합까지 엉망이냐고 까였다.

그러나 시범경기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결국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도 못하고 3군에만 있었다가 2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6월달에 콜업되서 무려 333일만에 1군 출장을 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과 그 외 잔부상으로 2군에 내려간뒤 소식이 없었다 은퇴를 했다.

박경완 은퇴

2군 감독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연수도 없이 바로 2군 감독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2군 첫 데뷔 경기는 패배했지만 자신의 선수시절처럼 강하게 훈련시켜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기대를 모았다.

SK 와이번스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는 현역 시절 등번호 26번은 영구결번이 확정이 되었다!

육성총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이만수가 경질이 되고 김용희가 부임이 될 때 박경완은 육성총괄로 부임했다.

2014년 FA때는 김강민을 무려 10시간이나 가둔 끝에 잔류에 성공했다 하더라.

이때의 평가는 좋았다.

배터리코치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육성총괄을 미루고 1군 배터리코치로 부임했다.

이때 키운 선수는 현 KIA 선수인 김민식을 강훈련을 시킨 결과 수비가 일치만장으로 는 결과가 냈고

역시 SK로 트레이드 된 이홍구 역시 수비 지적을 받았으나 SK 시절에는 수비 역시 안정되서 박경완의 평가는 늘었다.

각주

  1. SK 와이번스 최초 영구결번이다.
  2. 박경완이 밝힌 말로는 훈련이 너무 강하고 힘들어서 조범현 앞에서 대놓고 욕한적도 있다 한다.
  3. 이때 미움을 받아서 트레이드보다는 쌍방울이 재정난으로 주축 선수를 팔아넘겼던 것
  4. 한국 프로야구 포수로선 최초의 기록이다.
  5. 일명 팬서비스로 준 것이냐고 논란이 됐었다.